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2) 13~14세기 사회경제사 (하)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경북 영주 소수박물관 소장.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경북 영주 소수박물관 소장.

팍스 몽골리카의 번성한 국제 교류는 고려의 경제 발전을 자극했다. 그에 따라 인구가 증가했다. 12세기 인구는 250만~300만 명이었다. 14세기 말의 인구는 대략 600만 명이었다. 13세기는 대전란의 시기이므로 인구 증가는 주로 14세기의 일이었다. 짧은 기간에 인구가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은 14세기가 경제적으로 일대 고양기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농서 발간과 농장의 개간

14세기 고려인구, 경제발전으로 12세기보다 2배 증가…지방 지배세력도 교체…조선 '역성혁명'으로 이어졌죠

인구 증가는 농업의 발전을 촉구했다. 휴한농법이 극복되고 연작농법이 정착했다. 토지 연작을 위해서는 지력을 보충하는 비료의 투여가 필수적이었다. 농사는 보다 과학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었다. 1372년 원의 농서 <농상집요(農桑輯要)>가 간행된 것은 그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비록 수입 농서지만 한국사에서 최초로 발간된 농서였다.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는 토지의 활발한 개간을 불렀다. 관련해서는 안씨가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안향(1243~1306)의 손자 안목(?~1360)은 개경 부근 파주의 서쪽 들을 개간했다. 안목의 손자 안원(1346~1411)에 이르러 개간지 규모는 수만 결에 달하고 경작 노비는 수백 호나 됐다. 안씨가의 농장은 수조지 녹과전으로 이뤄진 권문세족의 농장과 달랐다. 그것은 농장주의 개인적 소유였다. 농장을 경작한 것은 노비들이었다. 노비노동에 기초한 새로운 생산양식(生産樣式)이었다. 그 점에서 안씨가의 농장은 조선왕조 15~16세기 농촌에서 일반화하는 양반가 농장의 선구를 이뤘다.

지방세력의 이동

13~14세기에 걸쳐 군현의 지배세력인 호장(戶長)을 위시한 토성(土姓) 집단이 해체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동했다. 몽골과의 전쟁에 따른 농촌의 황폐, 새로운 토지제도로서 녹과전의 시행, 뒤이은 귀족·관료의 농촌 침투, 대외교역의 활성화, 농촌 경제의 부흥과 같은 격동의 역사가 그 역사적 배경을 이뤘다. 지방세력의 해체와 이동에 관해서는 15세기 전반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전국 334개 군현의 토성(土姓), 망성(亡姓), 속성(續姓)의 실태에서 그 정보를 구할 수 있다. 망성은 13세기 후반과 15세기 전반 사이에 유망해 그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된 토성 집단이다. 속성은 같은 기간 다른 군현으로 이동한 토성 집단인데, 이동 후에도 호장 직을 수행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구분된다.

전국 2281개 토성 가운데 망성은 542개로 24%다. 망성은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발생했다. 이 두 도에서 새롭게 이동해온 속성의 수는 망성의 수에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개경에 가까워 중앙의 착취와 압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13세기 후반 이후 경기도와 충청도의 지방세력은 크게 위축됐다. 대조적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토성 집단은 안정적이었다. 이 두 도에서 망성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을 뿐더러 속성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속성의 3분의 2는 이동 후에도 여전히 호장 직을 수행했다. 이로부터 이 두 도에서 지방세력의 이동은 족세가 번창한 호장층의 일부가 다른 군현으로 이동해 그곳의 지배세력에 편입되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속성 가운데 호장을 내지 않은 집단은 대개 지방세력이 약한 속현이나 부곡으로 이동해 주민을 노비로 잡고 농장을 개척하는 등 품관(品官) 신분으로 정착했다. 그렇게 지역마다 양상을 달리하면서 조선왕조 이후에 펼쳐질 농촌사회의 구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인 집단의 해체

1390년 12월 고려왕조는 위화도 회군으로 공신이 된 이성계에게 식실봉(食實封) 300호와 노비 20명을 하사했다. 그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호적의 일부가 전하는데, 국보로 지정돼 있다. 그 호적에 개경에 거주하는 관료, 학생, 군인 신분 25호의 가계(家系)가 밝혀져 있다. 이성계에게 식실봉으로 지급된 자들이었다. 호주와 처의 본관과 성씨를 살피면 모두 52종이다. 그중의 26종은 본관 군현 토성 출신이다. 이들은 비교적 오래전에 개경으로 유입한 자들이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뒤 개경이 재건될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26종은 본관 군현의 속성 출신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오래전에 원거 군현에서 본관 군현으로 이동했다가 비교적 최근에 개경으로 유입한 자들이다. 거꾸로 원래의 국인이 지방 군현으로 내려가 지방세력의 일원으로 정착하는 흐름도 있었다. 그렇게 개경의 인구 구성은 14세기에 걸쳐 심하게 유동했다. 이전에 강조한 대로 고려왕조는 국인(國人)의 공동체였다.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는 국인이 아니었다. 호적에 적힌 그의 주소는 삭방도 화령부 동면 덕흥부였다. 고려는 더 이상 국인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 종국은 조선왕조를 연 역성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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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개경의 인구 구성은 14세기에 걸쳐 심하게 유동했다. 이전에 강조한 대로 고려왕조는 국인(國人)의 공동체였다.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는 국인이 아니었다. 호적에 적힌 그의 주소는 삭방도 화령부 동면 덕흥부였다. 고려는 더 이상 국인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 종국은 조선왕조를 연 역성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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