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9) 삼국의 경제와 사회 (상)
331년 전북 김제에 세워진 벽골제. 바닷물의 유입을 막는 방조제 역할을 했다.

331년 전북 김제에 세워진 벽골제. 바닷물의 유입을 막는 방조제 역할을 했다.

4~7세기의 논 유적은 지금까지 울산, 창원, 진주, 대구, 부여, 화성 등 도합 10여 곳에서 발굴됐다. 한 곳의 예외가 있지만, 논 한 구획의 면적은 대개 99㎡(30평) 안팎으로 작은 규모다. 논의 위치는 구릉의 완만한 하단부이며, 관개는 구릉을 흘러내리는 소량의 물을 이용하는 자연 방식이었다. 논과 더불어 수로의 유적도 발굴됐는데, 취수(取水)시설이 없어 배수로로 보인다.

인공관개는 없었다

경기 화성 송산동에서 발굴된 삼국시대 논 유적.

경기 화성 송산동에서 발굴된 삼국시대 논 유적.

삼국시대의 논농사는 아직 저수지나 보를 통한 인공관개와는 무관했다. 자연관개이기 때문에 논 면적은 클 수 없었고, 혼자서도 조성·관리할 수 있는 정도였다. 논갈이 도구는 삽이나 괭이 같은 수경구(手耕具)였으며, 소를 이용한 쟁기갈이는 아직 보급되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논은 쟁기를 들일 만큼 넓지 않았다.

밭 유적의 수는 논보다 많다. 관개의 제약이 크지 않기 때문에 단위 구획이 논보다 넓었다. 앞서 미사리의 밭 유적을 소개했다. 발굴된 면적만 해도 9900㎡(3000평)인데, 원래는 그보다 훨씬 컸다고 짐작된다. 이랑과 고랑의 폭이 각각 1m를 넘어 토지 이용은 매우 조방(粗放)적이었다. 유적에서 쟁기갈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밭갈이는 호미 등의 수경구를 이용해 흙을 긁어내는 방식이었으며, 노동의 주체는 10개 연(烟)이 결합한 세대복합체의 집단노동이었다.

하층민 주식은 조와 수수

인골에 대한 안정동위원소 분석은 삼국시대의 주요 작물이 벼, 맥류, 두류 등 C3계 식료였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런데 논 유적의 상태로부터 농업의 중심이 밭농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논농사 수준을 과대평가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인골 분석은 여성이 남성보다 C3계 식료를 더 많이 섭취했음을 전하고 있다. 이는 여성이 동물성 단백질로부터 상대적으로 차단된 가운데 두류 등 식물성 단백질을 주로 섭취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밭농사를 담당한 노동이 주로 여성이고, 남성의 생산활동은 여전히 수렵에 큰 비중을 뒀던 당시의 생태 환경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인골 분석은 유소(幼少)층이 성인에 비해 조, 수수, 기장 등 C4계 식료를 더 많이 섭취했음을 알려준다. 이 사실은 빈부나 연령 계층에 따라 식료가 달랐을 가능성을, 하층민의 주요 식료가 조, 수수, 기장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구려를 위시한 최초의 국가들이 백성을 어떻게 지배하고 무엇을 수취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수서(隋書)》에서 처음 찾아진다. 6세기 말~7세기 초의 고구려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세(稅)로서 포(布)와 곡(穀)을 수취했다. 포에는 비단, 마포, 모시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물목은 지방에 따라 달랐을 터다. 곡의 물목도 지방에 따라 달랐겠는데, 동 기록은 벼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읍락, 국, 국가의 지배 계층은 쌀을 주요 식료로 했다. 쌀은 정치적 위신재로서 하층민의 공납물이었다. 하층민이 쌀을 주식으로 삼는 것은 거의 1000년이 지난 16세기부터다.

세 수취의 기초 단위는 10명의 성인 남자로 이뤄진 호(戶)였다. 종래 역사가들은 그 호의 실체가 무엇인지, 결과적으로 세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를 둘러싸고 큰 혼선을 빚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고고학적 증거에서 분명하듯이 그것은 개별 세대인 연이 10개 결합한 세대복합체를 말했다. 고구려는 그 호에 대해 포 1필과 벼 1석(10두)을 수취했다. 포 1필은 40척(尺)이다. 그것을 열 세대가 4척씩 짜서 이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포 1필은 열 세대가 공동으로 직조했다. 반면 벼 10두는 개별 세대가 보유한 벼 가운데 1두씩을 갹출하는 방식으로 모을 수 있다. 그래도 공납하는 벼의 품질에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는 소비생활의 단위로 분리된 개별 세대 열이 제반 생산과 공납을 위해 공동 노동으로 결속한 세대복합체를 지배의 기초 단위로 삼았다.

비단 1필은 벼 1석보다 2배 가치

나아가 고구려는 취락을 공동수취의 단위로 지배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당시의 취락은 주거지 50기를 표준 형태로 했다. 곧 50개 세대에 5개 세대복합체의 집합이었다. 고구려는 그에 대해 포 5필과 벼 5석을 공동부담으로 수취했다. 그런데 세대복합체와 취락의 규모에는 편차가 컸다. 이에 고구려는 호의 크기를 3등급으로 나누어 세 부담을 조정했다. 그 결과 취락과 읍락(촌)에는 공동 부담 크기를 나타내는 특정의 과표가 부여됐다. 신라의 울진봉평비에서 그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수취의 중심은 포에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의 수취 규식은 포를 먼저 언급했다. 일반적으로 비단 1필은 벼 1석보다 2~3배 높은 가치였다. 포를 직조하기 위해 세대복합체와 취락을 공동노동의 대오로 편성한 것이야말로 삼국이 구축한 백성 지배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질을 이뤘다. (하편에 계속)

농업의 중심은 밭농사…쌀은 지배계층의 주식이었죠…성인 남성 10명으로 된 호(戶)를 기준으로 세금 물렸죠

■기억해주세요

삼국시대의 논농사는 아직 저수지나 보를 통한 인공관개와는 무관했다. 자연관개이기 때문에 논 면적은 클 수 없었고, 혼자서도 조성·관리할 수 있는 정도였다. 논갈이 도구는 삽이나 괭이 같은 수경구(手耕具)였으며, 소를 이용한 쟁기갈이는 아직 보급되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논은 쟁기를 들일 만큼 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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