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3월22일 오전 11시

토종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A사는 증권사의 사모 신탁을 통해 출자받은 돈으로 바이오기업 B사가 발행하는 상환전환우선주(RCPS) 60억원을 인수하려던 계획을 지난 20일 포기했다. 금융당국이 최근 신탁자산을 활용한 RCPS·사모사채 투자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의 구두지침을 각 증권사에 전달했기 때문이다. 초기 자본금이 바닥난 데다 올해 임상시험이 예정돼 있어 반드시 투자 유치가 필요했던 B사는 이른바 ‘죽음의 계곡’을 넘지 못한 채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다.

투자업계와 벤처업계는 감독당국이 사문화된 문구 해석에 얽매여 투자자와 초기기업이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자금조달 창구를 차단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신탁 활용한 메자닌 투자 전면 금지

[마켓인사이트] 증권사 신탁 투자 조이는 금감원… 벤처업계 "돈줄 마른다" 비상
2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신탁자산을 활용해 직·간접적으로 기업이 발행한 RCPS와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사모사채를 인수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구두지침을 내놨다. 신탁 계정에서 직접 RCPS를 인수하는 것뿐 아니라 경영참여형 PEF 등을 통한 간접 투자까지 금지한 셈이다.

금감원은 신탁법은 여신 행위를 허용하지 않는데 메자닌 투자는 대출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신탁을 통한 메자닌 투자는 불법이라는 견해다.

신탁은 수탁자(증권사·은행 등)가 위탁자(고객)의 돈을 맡아 운용해 수익을 내는 투자방식이다. 이번 구두 지침으로 증권사가 신탁으로 개인투자자를 모집한 뒤 PEF에 출자, 스타트업 등 초기기업에 투자해오던 관행이 모두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는 게 투자업계의 우려다.

◆갈 곳 잃은 개인투자자 벤처투자 자금

신탁을 통한 메자닌 투자는 기관투자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상장 전 지분투자(Pre IPO)’가 일반인까지 확대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증권사들도 사모펀드는 49명까지만 투자자를 모집할 수 있는 규제를 피해 더 많은 고객을 참여시킬 수 있어 신탁을 선호해왔다. 2014년 한국투자증권이 처음으로 신탁을 활용한 투자상품을 선보인 뒤 증권사들이 앞다퉈 벤처기업 투자를 위한 신탁상품을 내놓고 있는 이유다.

감독당국은 펀드 구성에 보통주 등이 섞여 있을 경우 일부 메자닌 투자는 허용할 수 있다는 견해다. 하지만 허용 가능한 메자닌의 비중을 명시하지 않아 일단 대부분의 투자는 중단된 상태다. 금감원 관계자는 “신탁 자산을 활용한 사모사채 투자에 관한 내용을 확정한 바 없다”고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RCPS 투자 위축 불가피

벤처 및 투자업계는 이번 조치가 RCPS 투자를 위축시킬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RCPS는 투자자가 일정 기간 뒤 투자금 상환을 요청할 수 있는 상환권.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환권 등이 포함된 증권이다. 이 같은 안전장치 때문에 벤처기업이 필요 자금을 보통주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국내 벤처캐피털(VC)업계의 RCPS 투자 비중은 2006년 27.1%에서 지난해 말 50%를 넘어섰다. 미국은 전체 VC의 우선주 투자 비중이 90%를 넘는다. VC업계 관계자는 “이번 구두지침으로 RCPS 투자 위축이 불가피해 VC업계에 대혼란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 상환전환우선주(RCPS)

채권처럼 만기 때 투자금 상환을 요청할 수 있는 상환권과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환권, 회사 청산이나 인수합병(M&A) 시 매각대금 분배 등에 보통주보다 유리한 권리를 가지는 우선권을 가지고 있는 주식.

이지훈/유창재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