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경영' 나서는 기업들

삼성전자→1차 협력사는 2005년부터 현금 지급
1차→2차 거래대금은 어음결제 아직도 지속

시중은행에 5000억 맡겨 은행이 무이자대출 심사
경영개입 등 위법논란 차단
삼성, 중소기업과 '상생 생태계' 확장…2차 협력사 임금체불 방지 기대

지난해 국내 한 대기업은 공장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폐기물 처리 업무를 A사에 위탁했다. A사는 다시 2차 협력업체인 B사에 일부 공사를 위탁했지만 자금난을 겪자 거래 대금을 지급하지 않고 잠적했다. B사는 받지 못한 미지급 대금을 요구하며 원청기업인 대기업 본사 앞에서 약 1년째 농성을 하고 있다.

해당 대기업 관계자는 “사정은 딱하지만 우리는 B사와 계약하지 않았고 A사가 하청을 준 사실도 몰랐다”며 “인정에 이끌려 이 업체의 요구를 들어줬다가는 경영진이 배임죄로 처벌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1, 2차 간 분쟁 의외로 많아

삼성전자가 25일 5000억원 규모 ‘물대(물품대금)지원펀드’를 조성해 2차 협력사를 지원하기로 한 것은 1·2차 협력사의 분쟁이 원청기업인 자사에도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다. 1차 협력업체에서 부당하게 피해를 입은 2차 협력업체가 공정거래위원회나 법원 등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법적 책임이 없는데도 어쩔 수 없이 분쟁에 끌려들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하반기 2차 협력사들과의 간담회에서 가장 많은 요청을 받은 것도 1, 2차 간에 현금 결제 관행을 정착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삼성, 중소기업과 '상생 생태계' 확장…2차 협력사 임금체불 방지 기대

삼성전자는 1차 협력사에는 2005년부터 거래 대금을 현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2013년에는 거래 마감 후 10일 이내 대금 지급을 완료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지만 1차 협력사가 2차 협력사에 약속어음으로 지급하는 관행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이형준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1차 협력사가 2차 협력사에서 제품을 납품받은 뒤 원청 대기업으로부터 제품 값을 받기까지 45~60일가량 시간이 걸리는데 이를 어음으로 결제하는 관행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2015년 협력사에 대한 현금 결제 관행을 정착시키기 위해 ‘상생결제제도’를 도입했다. 대기업이 발행한 매출채권을 대기업의 신용도로 은행에서 할인해 현금화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제도다. 세금 감면 지원책 등으로 작년 말까지 약 2년간 10만9248개 기업이 91조2576억원을 활용했다. 하지만 전체의 98.7%인 90조원이 1차 협력사들의 실적이라고 중소기업중앙회는 지적했다.
< 거리로 나온 단체들 >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잘 알려지지 않은 시민단체들까지 각종 요구를 쏟아내고 있다.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3시 STOP 공동행동’ 회원들이 25일 광화문광장에서 ‘임금 하락 없는 주 35시간 노동제 도입’ 등을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 거리로 나온 단체들 >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잘 알려지지 않은 시민단체들까지 각종 요구를 쏟아내고 있다.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3시 STOP 공동행동’ 회원들이 25일 광화문광장에서 ‘임금 하락 없는 주 35시간 노동제 도입’ 등을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선 공약에 화답

삼성전자가 이날 도입한 제도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건 ‘하도급 근로자의 임금 체불 방지’ 효과도 있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하도급 근로자의 임금은 원청기업이 직접 입금하도록 하는 방안 등을 공약했다. 삼성 측의 대금 지급 방안은 시중은행들의 대출심사를 거치는 데다 2차 협력사들이 현금으로 납품대금을 받기 때문에 임금이 체불될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대기업이 그동안 위장 도급, 불법 파견 논란 등으로 2, 3차 협력사 지원에 소극적이던 관행이 조금씩 바뀔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삼성 측은 경영 개입에 따른 위법 논란을 피하기 위해 펀드를 조성하고 시중은행이 대출 심사를 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5000억원 규모 펀드 운용을 통해 은행도 최소한의 수익원을 가지면서 대출 심사 및 리스크를 부담하는 구조다. 펀드 운용 기간을 3년으로 제한한 것은 향후 여건 변경 등에 따라 펀드 구조를 변경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이 본부장은 “원청기업이 2, 3차 협력사를 지원하는 데 따르는 불법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며 “공공기관, 대기업이 비슷한 제도를 채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처럼 내부 보유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대기업에 펀드 조성이 재무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국인 주주들이 회사 경영과 관계없는 불필요한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할 수도 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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