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막연한 반원전 기류
축적된 기술·노하우 걷어차는 것
수출 효자산업 외면하는 일 없어야"

전휘수 < 한국수력원자력 발전부사장 >
[기고] 거꾸로 가는 한국의 기술 시계

트렌드(Trend). 사전적 정의로 ‘동향’ ‘추세’를 의미하는 이 외래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문화, 패션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 경제, 산업 분야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이 표현은 유행에 민감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잘 반영하는 용어다.

이런 유행 추구와는 상반되는 내용의 도서가 화제다. 《축적의 시간》이 그 책이다. 무심코 봐서는 책 제목의 두 단어가 상반된다는 것을 눈치채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축적’과 ‘시간’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보존성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발간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이 책은 우리나라 최고 석학인 서울대 공과대학 26명의 교수진이 참여해 국내 산업의 현주소를 분석하고 전망을 제시한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후 5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괄목할 만한 산업 성장을 이룬 ‘코리아’가 최근에는 왜 정체되고 주춤할 수밖에 없을까. 우리의 선진국 모방 및 추격 전략은 한계에 다다랐고 이제는 고부가가치 핵심기술 개발과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이 필요하다. 이런 역량은 한순간에 이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만 축적할 수 있는 자산이다.

얼마 전 원자력산업에 몇 가지 이슈가 생겼다. 경북 월성원자력 1호기 계속운전 취소 판정과 신고리원자력 5, 6호기 신규 원전 건설 찬반 논란이다. 아마도 지난해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과 함께 커진 국민의 원전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원전 운영과 신규 건설에 더욱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기술로 이뤄낸 아랍에미리트(UAE) 신규 원전 건설과 운영 인력을 수출한 사실은 이런 논란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우리 힘으로 이룬 큰 성과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관한 논란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말이다. 막연히 원전은 위험하고 환경에 해를 끼친다고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아도 해외에 신규 원전을 건설 중이고, 단순한 건설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력까지 수출한 사실을 아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신규 원전 건설 중단과 원전 수출이 트렌드와 축적만큼이나 상반된 이 사실은 우리사회에 공존하는 우리의 양면적인 모습이다. 국내 산업 발전과 함께 성장한 원자력산업은 현재 축적된 원천기술과 노하우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건설에 그치지 않고 수조원대에 이르는 운영 인력까지 수출했으니 그야말로 국위선양을 하는 효자 수출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 사정이 사뭇 다르다. 이미 엄정한 절차에 따라 허가가 난 신규 원전 건설을 취소하자는 주장이 격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반(反)원전 패러다임은 이 시대의 많은 ‘트렌드’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을 낼 때는 정확한 현실 인식과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 주장이 미치는 파급효과와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의심 없이 어떤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년 취업률이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실질적인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가리키는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는 더욱 신중한 선택이 요구된다. 막연히 그게 옳은 것 같아서, 혹은 더 좋아 보여서 시류에 편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철저한 자기반성과 현실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은 우리의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를 무너뜨릴 때가 아니라 이를 더욱 공고히 다지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때다. 전 세계가 축적을 목표로 수많은 실패를 통해 노하우를 쌓아 나가는 이때 우리는 이미 축적해 놓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마저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봐야 할 때다.

전휘수 < 한국수력원자력 발전부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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