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때 집현전은 미국 스탠퍼드대의 D스쿨처럼 창의적인 의견을 주고받는 공간이었다. 한글과컴퓨터의 ‘집현전 학자들, IT한글을 만나다’ 공연 장면.
세종대왕 때 집현전은 미국 스탠퍼드대의 D스쿨처럼 창의적인 의견을 주고받는 공간이었다. 한글과컴퓨터의 ‘집현전 학자들, IT한글을 만나다’ 공연 장면.
디자인 싱킹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브레인스토밍은 프로젝트와 관련해 팀원들이 생각나는 대로, 세밀한 분석과 판단 없이, 평가나 비판 없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한다. 덜 다듬어졌더라도 많은 아이디어를 이른 시간에 모아 공유하는 게 필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펼치기가 쉽지 않다. 기업이나 조직에서 책임이 뒤따르는 의견과 아이디어를 부담 없이 제시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집단 구성원으로서 수시로 문제 해결과 개선을 위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지만 내 생각이 완벽하지 않아 자신이 없거나 책임 추궁을 당할까 움츠리게 된다.

작은 실패들을 강조하는 디자인 싱킹 과정을 수행할 때는 ‘모든 아이디어는 동등하다’는 기본 원칙을 프로젝트 공간에 게시한다. 연공서열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많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필자가 방문했던 포츠담대와 스탠퍼드대의 D스쿨이나 독일 SAP앱하우스에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아이디어를 도출하기 위해 팀원이 모이는 창의적인 공간이었다. 분위기는 자유로웠고 구조는 가장 효율적으로 계획·설계돼 있었다. 이는 팀원 간 원활한 소통으로 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생각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간단한 그림과 함께 내용을 포스트잇에 굵고 크게 적어서 프로젝트 공간 벽에 공유한다. 또 아이디어를 값싼 문구로 빨리 시제작(프로토타이핑)해 시각적·촉각적으로 소통 효과를 높인다.

디자인 싱킹이 한국에 소개된 지 10여년이 됐지만 크게 주목받거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관료적이고 위계 질서를 중시하는 사회적 특성과 자유롭고 활발하게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소통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다행히 최근에는 기업을 중심으로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수평적인 소통을 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조직이 변하려면 구성원이 달라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더의 생각과 일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디자인 싱킹으로 창의적 생각을 나누고 혁신의 방법을 찾으려 할 때 리더에게는 무엇보다 수평적·수용적 태도와 자질이 요구된다. 팀원들이 창의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것도 리더의 역할이다. 이런저런 방법론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가 혁신의 리더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한경 BIZ School] 세종대왕 때 집현전은 조선의 'D스쿨'이었다
1983년 일본 과학사학자 이토 야마다가 쓴 《과학기술사사전》에는 기원전부터 20세기까지 세계적인 과학기술 업적이 나오는데, 15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업적에 조선시대의 과학기술이 29건, 중국이 5건, 나머지 국가가 28건이라고 기재돼 있다. 당시 세계 최첨단 기술 가운데 47% 정도가 세종대왕 재위 30여년간의 업적이라고 한다. 한글, 금속활자,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이 그것이다. 세계사적인 업적을 이룬 세종대왕을 디자인 싱킹 과정에서 재조명해보자.

# 첫째 단계 ‘공감하기’

세종은 오전 9~11시에 윤대(輪對)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영의정, 좌의정 같은 고위층이 아니라 말단 신하들과 돌아가면서 1 대 1 심층 인터뷰를 하는 것이다. 오후 1~3시에는 경연을 했다. 신하들이 임금을 가르치는 자리다. 이때 특이한 것은 나이 든 관료와 집현전의 젊은 학자를 동시에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젊은 학자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과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후 10시에서 밤 12시 사이에는 구언(求言)을 했다. 때로는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의 삶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고 보고하게 했다. 세종은 지위 고하, 노소 구분 없이 문제해결 팀을 구성해 문제를 찾고 백성의 삶에 공감하기 위해 관찰, 인터뷰, 간접 체험을 많이 한 분이었다.

# 둘째 단계 ‘문제 정의하기’

세종은 백성이 원하는 진짜 문제를 찾아 정의하고 공유했다. 대표적인 것이 한글 창제 결정이다. 고위층, 기득권자들은 우리글에 대한 필요와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백성의 불편과 필요를 헤아렸고, 그로 인한 문제를 정확히 파악했다. 통용되는 글자의 유무는 다른 민생에도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 정의함으로써 당대를 넘어 많은 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 셋째 단계 ‘아이디어 도출하기’

세종은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해 항상 찬성팀, 반대팀, 중립팀으로 나눠 장시간 논쟁시키고 경청하며 관찰했다. 장영실, 황희, 맹사성, 정인지 등의 인재에게는 집현전 같은 장소에서 창의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실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줬다. 집현전은 다양한 분야의 인재가 교류하며 매일 오후 왕(리더)과 함께 아이디어를 모으는 조선의 D스쿨 역할을 했다.

# 넷째 단계 ‘시제작’ 및 다섯째 단계 ‘테스트하기’

혁신과 개혁에는 항상 반대자가 있기 마련이다. 세종도 수많은 혁신과 제도 개혁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토타이핑을 거쳐야 했다. 신하들은 물론 백성을 대상으로 시안이 완벽해질 때까지 집요하게 테스트했다고 한다.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문제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시대를 이끄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세종이 즉위해 제일 먼저 한 얘기가 “나는 잘 모르니 함께 의논해서 하자”는 말이었다고 한다. 백성의 삶을 중심으로 소통을 통한 협업을 중시하는 지도자로서의 면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경원 <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