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문제의 소지 있다'는 생보협회 개정 건의 묵살
'고칠 필요 없다'더니 2010년 돼서는 협회 요구대로 바꿔

금융당국이 최근 자살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던 생명보험사에 중징계를 내렸으나 정작 과거에 보험업계가 관련 표준약관에 문제가 있다며 개정 요청을 했을 때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4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생명보험협회는 실무 작업반을 구성해 생명보험 약관에 대한 전반적인 개선안을 2001년 12월에 금융감독원에 건의했다.

2001년은 생보사가 재해사망을 보장하는 상품을 막 팔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 생보업계가 건의한 내용에는 현재 문제가 된 약관이 포함됐다.

보험사의 면책 조항 중 면책이 제한된 경우를 규정한 약관이다.

해당 약관에서 보험 대상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 보험사가 보험금을 줄 필요가 없다면서 보험 대상자가 정신질환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와 계약의 효력이 발생한 날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자살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는 단서가 달려있었다.

당시 생보업계는 이에 대해 "2년이 지났다고 해서 자살한 이에게 일반사망이 아닌 고액의 재해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은 사회통념과 상법취지에 어긋나며, 오히려 범죄조직과 결탁한 사채업자 등에 의한 사행성만 조장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년이 지난 후 자살할 경우 재해 이외의 원인에 의한 보험사고로 보아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금감원은 당시 생보업계의 개선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제의 약관을 그대로 놔뒀다.

금감원은 이에 대해 재해사망보험은 생명보험과 종류가 다른 상해보험의 부류로, 재해사망 보험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생명보험 표준약관을 고칠 이유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보험사가 문제가 된 상품의 약관을 스스로 고치면 되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생보업계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재해사망 보험이 생명보험의 일종이고, 생보사가 파는 보험인 만큼 생명보험 표준약관을 참조하는 게 맞다고 반박한다.

게다가 당시 보험사가 금융당국이 제시한 표준약관과 다르게 상품 약관을 만들 수 있었던 분위기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금감원의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당시 표준약관이 수정됐다면 현재와 같이 자살보험금 문제가 커지지 않을 수 있어 금감원의 판단이 아쉬운 대목이다.

금감원은 그러나 고칠 필요가 없다던 약관을 자살보험금 문제가 본격화된 2010년에 현재의 형태로 개정했다.

바뀐 약관은 생보업계가 2001년 건의했던 바와 큰 차이가 없다.

금감원은 2009년 12월 보험상품의 표준약관 개정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면서 낸 보도자료에서 "2년 경과 후 자살할 경우 표준약관에는 일반사망보험금과 재해사망보험금 중 어떤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지 정하고 있지 않다"고 문제점을 진단했다.

이어 자살에 대해 "고액의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할 경우 고의사고를 조장할 우려가 있어 일반사망보험금 이하로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표준약관에 모호한 측면이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당시 뒤늦게 개정한 이유에 대해 "표준약관을 고칠 사안이 아니지만 보험사들이 계속 지적해 개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개정 당시 보도자료에서 밝힌 설명과는 거리가 멀다.

금감원은 이후 문제가 된 약관으로 판매된 보험상품에 대해 재해사망보험금을 줘야 한다고 생보사를 압박하고 미지급한 보험사에 중징계를 내렸다.

결과적으로 생보사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기는 마찬가지다.

당시 약관이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음을 인지하고 수정을 요구했음에도 정작 소비자와 법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자살은 재해사망이 아니다'며 재해사망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pseudoj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