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삼동 구스아일랜드 브루하우스에서 필립 랭크모어 브루마스터가 맥주를 따르고 있다. 구스아일랜드 제공
서울 역삼동 구스아일랜드 브루하우스에서 필립 랭크모어 브루마스터가 맥주를 따르고 있다. 구스아일랜드 제공
미국 시카고에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시카고 강이 있다. 이 강이 두 줄기로 갈라지는 곳엔 작은 섬이 있다. 거위가 많이 살아 ‘구스아일랜드(거위섬)’라 불린다. 1988년 이 섬에서 미국 1세대 수제맥주가 탄생했다. 맥주 이름은 섬 이름을 그대로 따온 ‘구스아일랜드’. 시카고 사람들의 자존심으로 불린다. 이 맥주가 30년 만에 시카고 밖으로 나왔다. 구스아일랜드의 두 번째 양조장으로 선택된 나라는 대한민국. 지난해 12월 서울 역삼동에 터를 잡았다.

시카고 대표 맥주와 최상급 스테이크 ‘꿀조합’

시카고서 날아온 구스아일랜드 '맥덕'의 성지가 되다
구스아일랜드는 문을 열자마자 ‘맥덕’(맥주와 마니아를 뜻하는 ‘덕후’를 합친 신조어)들의 새로운 성지(聖地)로 떠올랐다. 시카고에 가야만 맛볼 수 있는 수제맥주가 종류별로 있다. 대규모 양조장을 갖춘 ‘브루잉펍(brewing pub)’은 외관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옥상까지 3층 높이 건물에 초대형 양조 시설과 맥주를 숙성시키는 배럴이 가득 들어차 있다.

맥주 좀 마신다는 사람들은 이곳을 그냥 지나치기 쉽지 않다. 클래식 5종(혼커스에일, 312어반위트에일, 구스IPA, 포스타필스, 그린라인페일에일)을 포함해 와인 병에 담긴 상위급 맥주 ‘줄리엣’ ‘길리앙’ ‘소피’ 등도 인기다.

구스아일랜드에선 다이어트 고민은 잠시 접어두는 게 좋다. 약 30일을 숙성시켜 구워낸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와 맥주를 섞어 반죽한 마늘 치킨,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디저트까지 수준급 요리가 가득하다. 맥주를 만드는 철학을 음식에도 담았다. 18명의 셰프가 지키는 ‘어반 크래프트 키친’이 구스아일랜드의 또 다른 자랑이다. 소스 하나까지 기성품을 쓰지 않고 주방에서 직접 만들어낸다는 얘기다.

최고의 무기는 호스퍼 오븐이다. 아시아에 몇 대 없다는 이 오븐은 가격만 2억원에 달한다. 10분 만에 600도까지 올라 스테이크의 육즙은 가두고 겉은 순식간에 익히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 음식에도 맥주는 적극 활용된다. 인디아페일에일(IPA)을 섞은 치즈 소스는 튀김 메뉴와 함께 나온다. 샴페인 같은 맛이 특징인 맥주 ‘소피’는 치킨 등 튀김 메뉴의 반죽에 쓰인다. 차준욱 구스아일랜드 셰프는 “구스아일랜드의 맥주는 각각 독특하고 새로운 맛과 향을 낸다”며 “최상의 조합을 찾기 위해 음식도 여러 가지 실험작을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시카고서 날아온 구스아일랜드 '맥덕'의 성지가 되다
100% 수작업 고집…맥주야, 위스키야?

시카고서 날아온 구스아일랜드 '맥덕'의 성지가 되다
구스아일랜드는 100% 수작업을 고집한다. 창업자의 철학과 연관있다. 구스아일랜드는 창업자인 존 홀이 1980년대 초 떠난 유럽 여행에서 시작됐다. 유럽 지역별 맥주를 마신 그는 맛과 향에 빠져들었다. 고향 시카고에 돌아와서도 잊을 수 없었다. “미국인도 맛있는 맥주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카고의 거위섬에 작은 양조장을 세웠다. 1988년 ‘구스아일랜드’라는 브랜드로 내놓은 첫 작품은 ‘혼커스에일’. 1990년에는 시카고 지역번호를 딴 ‘312어반위트에일’과 ‘구스IPA’를, 1992년에는 ‘버번카운티’를 선보였다. 당시 버번카운티는 혁신 그 자체라는 평가를 받았다. 맥주업계 최초로 ‘버번 배럴 에이징’ 방식을 쓴 임피리얼스타우트다.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통에 맥주를 숙성하면 버번위스키의 풍미가 녹아들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만들어낸 맥주다. 지금은 미국 전역의 소규모 양조장에서도 이 배럴 에이징 방식을 쓴다.

시카고서 날아온 구스아일랜드 '맥덕'의 성지가 되다
이 양조장은 지금도 700만㎡의 홉 농장에서 홉을 재배하고, 15종 이상의 효모를 배양해 맥주를 제조한다. 브루어들은 발효조에 투입해야 하는 드라이 호핑을 위해 약 12m의 발효조에 오르고, 수백㎏의 곡물을 제분기에 채운다. 또 맥주에 들어갈 오렌지 껍질도 직접 손질한다.

이달 서울점에서는 시카고에서 날아온 브루마스터가 한국 브루어들과 심혈을 기울여 숙성한 맥주도 내놓는다.

호주 출신의 화학 전공자인 필립 랭크모어 브루마스터는 “미국 여행 중 다양한 수제맥주의 매력에 빠져 이 길을 걷게 됐다”며 “완전히 새로운 맥주를 선보이기 위해 요즘 한국 전통 식재료를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수제맥주, 2조원대 성장 전망

이들은 해외 첫 지점으로 왜 서울을 택했을까. 한국 수제맥주 시장의 성장 가능성 때문이다. 국내엔 70여개 소규모 양조장이 있다. 최근 3년간 매년 100% 성장했다. 같은 기간 수입맥주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30%)을 훨씬 웃돈다. 업계는 수제맥주 시장 규모를 200억원대로 보고 있다. 10년 뒤에는 2조원대까지 성장할 것으로 추산한다. 최근 몇 년 새 대기업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고, 벤처캐피털도 속속 발을 담그는 이유다.

수제맥주는 기존 대기업의 공장 맥주가 아니라 소규모 양조업자가 각자의 조리법에 따라 만든 맥주다. 정해진 틀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기호와 취향에 따라 첨가물이 달라지고, 맛과 향도 다 다르다. 1000가지가 넘는 맛이 있다고 알려졌다. ‘혼술족’이 늘고 다양한 맥주 맛을 찾는 사람이 증가하면서 수제맥주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다. 경희대 관광대학원에는 지난해 수제맥주 전문가를 키우는 ‘비어 소믈리에 과정’이 생겼고, ‘낮맥(낮에 마시는 맥주)’ ‘혼맥(혼자 마시는 맥주)’ ‘펍 크롤(맥주가 맛있는 펍을 순례한다는 뜻)’ 등의 단어도 유행처럼 번졌다. 구스아일랜드 관계자는 “유럽과 일본은 이미 수제맥주 시장이 활성화돼 있어 성장 여력이 작다”며 “한국은 성장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사람들의 입맛도 예민해 아시아 시장의 리트머스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