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5년간 31억달러(약 3조6천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미국 투자 계획을 전격적으로 내놓은 현대자동차가 현지 신규 공장 건설을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이번 투자에 이어 미국 신규 공장까지 건설하게 되면 당장 국내에서 현지로 가는 수출 물량이 줄어들고 이는 곧 국내 생산 설비 감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생산 설비 감축은 민감한 노사 문제로도 대두될 수 있다.

그렇다 해서 연구개발(R&D) 같은 투자 계획만 밝힌 채 추가로 공장을 짓지 않는다면 '미국 내 공장 건설과 일자리 창출'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기대에는 못미치는 수준이 된다.

현대차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놓인 셈이다.

정진행 현대차 사장은 17일 서울에서 외신기자를 상대로 대규모 미국 투자 계획을 밝혔다.

블룸버그 등 외신기자 몇명만 초청한 비공개 신년인사회 자리에서 이처럼 굵직한 경영전략을 밝힌 것은 이례적인 일이란 게 재계의 평가다.

그만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었다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에 대놓고 미국 투자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이뤄진 만큼 현대차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트럼프 당선인을 의식했다는 해석을 낳았다.

정 사장이 이날 공개한 미국 투자 규모는 31억달러로 지난 5년간 현지에 투입한 21억달러(약 2조5천억원)보다 많은 액수다.

하지만 이번 투자안에는 미래 신기술 개발, 환경 개선 등이 담겼을 뿐 신규 공장 건설 계획은 빠졌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현재 미국에 앨라배마 공장과 조지아 공장을 각각 운영하고 있다.

2003년과 2006년 두 공장을 짓는데 각각 10억달러(약 1조2천억원)와 12억달러(약 1조4천억원)가 들었다.

현대기아차는 현재 미국에 연간 140만대의 자동차를 판매하고 있다.

이 가운데 73만대는 현지 공장에서 생산하고 나머지 67만대는 한국에서 수출하는 구조다.

현대기아차가 미국 생산을 늘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한국 수출 물량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현지 시장상황을 고려하더라도 현대기아차로서는 미국에 공장을 더 지어야할 절실한 이유가 없다.

최근 미국 내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수요가 늘면서 작년 7월부터 조지아 공장에서 생산하던 싼타페 물량 일부를 앨라배마 공장으로 돌리기는 했지만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상황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정 사장은 이날 외신기자들과 만나 미국에 현대차 제2공장을 지을 가능성에 대해 "수요가 있다면 공장을 짓는 것을 검토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짓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도 아니고 짓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도 아닌 모호한 답변인 셈이다.

현대차의 고민이 잘 드러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정 사장은 만약 공장을 짓게 되면 어떤 차종을 생산할지를 묻는 말에도 "SUV도 있고 제네시스도 있는데, 공장을 짓는다면 시장에서 팔리는 것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라며 원론적인 수준에서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미국 자동차 시장은 장기적으로 볼 때 수요가 늘어나는 곳이 아니다.

기존 현대기아차 미국 공장과 멕시코 공장만으로도 충분히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현대차로서는 트럼프의 강한 압박과 국내 노조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coo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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