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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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억달러(약 2조3000억원) 자산을 보유하고도 호텔을 떠돌며 생활하는 억만장자. 그에겐 ‘무소유 억만장자’ ‘집 없는 재벌’ ‘자본주의 개혁을 꿈꾸는 좌파 재벌’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파이낸셜타임스(FT)를 비롯한 유명 언론들이 ‘세계 최고 갑부 중 한 명’으로 소개하는 그는 니콜라스 베르그루엔(55). 투자회사 베르그루엔홀딩스 이사회 이사장인 그는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았고, 지난해엔 서울시 명예시민에 위촉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10대 땐 맹렬한 좌파

베르그루엔은 196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독일인인 아버지 하인츠 베르그루엔(1914~2007)이 나치를 피해 달아난 곳이 파리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미술계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와 친구가 됐고, 자신의 이름을 딴 베르그루엔미술관도 세웠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특권’을 누리던 베르그루엔은 10대 때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맹렬 좌파가 됐다. “제국주의 언어인 영어는 배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스위스의 기숙학교에선 학생들을 선동한 혐의로 쫓겨나는 등 적지 않은 말썽을 일으켰다.

그러던 중 “변혁을 위해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며 1979년 미국 뉴욕대에 입학했다. 뉴욕대에선 재정학과 국제 비즈니스학을 전공했다. 열성 좌파로 불리던 청년이 비즈니스를 전공으로 택한 모순에 대해 그는 “진짜 세계와 자본주의를 알려면 작동법을 배워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대학에서 영어, 독일어를 익혔다.

1984년 사회로 나와 콜롬비아 재벌의 장남인 훌리오 마리오 산토도밍고 주니어와 공동으로 알파인베스트매니지먼트라는 투자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20여년 동안 각종 인수합병(M&A)을 통해 자회사 50여개를 관리하는 베르그루엔홀딩스로 키워냈다. 베르그루엔 홀딩스는 독일 유명 백화점 기업인 칼슈타트와 엘파이스·르몽드를 소유한 스페인 미디어 재벌 라 프리사, 버거킹 등의 부동산과 주식을 대거 보유하고 있다.

집도 차도 버리고 ‘무소유’ 선택

투자로 벌어들인 돈으로 베르그루엔은 부(富)를 마음껏 즐겼다. 미술관 소유주의 아들답게 소장한 그림이 많았고, 미국 뉴욕과 플로리다에도 저택을 소유했다. 전용 제트기도 샀다. 할리우드 스타들과 어울리며 화려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2001년 그는 개인 소유물을 모두 버렸다. 그림은 아버지가 설립한 미술관에 장기 임대로 넘겨버리고 집과 차를 모두 팔아치웠다. 이동의 편리성을 위해 전용 제트기만 남겼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근사한 것들에 둘러싸여 생활하며 주변 사람들과 나 자신에게 내가 부유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에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용기가 착륙하는 도시의 호텔에서 생활한다. 옷은 종이백에 넣고 다닌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술도 전혀 마시지 않는다. 언론과 가끔 인터뷰하지만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개인 신상도 철저히 비밀로 해왔다. 10여년 전 네덜란드의 한 잡지가 자신의 신상을 기사화하자 모두 구입해 폐기한 적도 있다. 그는 FT와의 인터뷰에서 “학교 다니는 것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이후엔 내 힘으로 일궈냈다”고 말했다.

‘철학계의 노벨상’ 만들어

모든 것을 ‘비운’ 뒤 베르그루엔의 삶은 바뀌었다. 대학 강의에 나서기 시작했고, 서구 정부의 결함에 관심을 가졌다. 2010년 “시간과 에너지는 제한된 자산이다. 이왕이면 효율적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고 싶다”며 재산 1억달러를 투자해 싱크탱크 베르그루엔 재단을 만들었다. 이 재단은 지성적 사회, 지성적 민주주의, 지성적 거버넌스를 추구한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재단에 21세기위원회를 세웠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에 들어갔다. 서구의 인권 개념과 정부의 능력, 동양적 미덕인 조화를 실천하기 위해 2010년 10월 2500만달러를 들여 ‘캘리포니아를 위해 오래 생각하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적자로 기울어가던 캘리포니아주를 유토피아로 탈바꿈시키겠다는 목적에서다. 콘돌리자 라이스·조지 슐츠 전 미국 국무장관, 빌클린턴 대통령의 경제고문이었던 로라 타이슨 등이 여기에 참여했다. 기업에선 에릭 슈밋 구글 회장, 야후와 워너브러더스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테리 세멜이 함께했다. 이 위원회는 공평 과세, 예산 개혁 등의 프로젝트를 추진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베르그루엔은 지난해 재단을 통해 ‘베르그루엔 철학상’을 제정했다. 사상(ideas)이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왔는데도 사상가나 철학자를 기리는 상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해서다. 이 상은 ‘철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심사위원단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스펜스 뉴욕대 교수 등 저명 학자 9인으로 구성돼 있다. 상금은 100만달러(약 11억6000만원).

이달 현대 철학의 거두로 불리는 찰스 테일러 캐나다 맥길대 명예교수(85)가 제1회 베르그루엔 철학상을 수상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테일러 교수는 문화다원주의를 정치철학 안으로 가져와 이론화한 것으로 명성이 높다. 다른 문명과 지적 전통에 대한 인정과 존중의 중요성을 일깨운 철학자다. 그의 연구는 서구 문명이 단순한 단일 문명이 아니라 다양한 문명의 산물임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르그루엔은 “나는 자본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좋은 것이다. 역동적이고 개인의 이익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다”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절한 혼합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