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서울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을 지나다 보면 큼지막한 초록색 간판과 잔뜩 쌓인 책이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 있다. ‘공씨책방’이다. 이름이 이런 이유는 간단하다. 창업자 성이 공씨다. ‘헌책방 1세대 선구자’로 불리던 고(故) 공진석 씨다.

49.5㎡짜리 작은 가게에 들어서니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책이 빼곡히 쌓여 있다. 헌책의 나이보다 더 많이 세월을 품었을 듯한 책장도 많이 보인다. 장화민 공씨책방 대표(60)는 “버리기 너무 아까워 이사 다닐 때마다 계속 갖고 다닌 책장이 여러 개”라며 “저 책장들과 책을 리어카와 용달차에 싣고 이사 다닌 게 너댓 번인데, 이제 또 옮기게 됐다”고 말했다.

장 대표의 얼굴엔 회한 어린 미소가 번졌다. 신촌에 둥지를 튼 지 25년이 된 공씨책방은 이제 11월이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임대료를 올려 달라는 건물주 요청도 있고, 유지비를 감당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그냥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죠.” 그는 그렇게 공씨책방과 함께해온 날들을 하나둘 털어놓았다.

이모부 권유로 얼떨결에 시작

공씨책방은 공진석 씨가 1972년 서울 회기동 경희대 앞에 대학 교재를 파는 서점을 연 게 시작이었다. 그는 대학 교육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책을 사랑했다. 독학으로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를 공부해 웬만한 책의 내용은 알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우리 서점이 입소문을 타게 된 건 다른 가게엔 없는 귀한 교재나 서적들을 이모부가 어떻게든 구해오셨기 때문”이라며 “이모부는 책을 파는 장사꾼의 마음으로 일하는 분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그 당시엔 청계천에서 헌책을 떼어다 파는 구조였어요. 헌책들이 청계천에 몰려 들면, 동네 헌책방 주인들이 가져가서 파는 거죠. 도매와 소매시장을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이모부는 아무 책이나 가져오지 않으셨어요. 아무리 잘 팔린다 해도 본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로 사오지 않으셨죠.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한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책을 파는 것으로 대신 풀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장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모부로부터 책을 많이 얻어 읽었다. 그러던 중 장 대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6년, 얼떨결에 ‘책방 카운터’ 아르바이트를 맡게 됐다. “매장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이모부는 책 구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고, 이모는 책방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거든요. 저도 책을 좋아하다 보니 그러겠노라 했죠. 그땐 이게 제 평생의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죠.”

헌책의 진정한 가치에 눈뜨다

[人사이드 人터뷰] 신촌 떠나는 '1세대 헌책방' 공씨책방 장화민 대표
회기동에서 ‘뜬’ 공씨책방은 청계천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1980년대 중반 서울 광화문에 당시로선 최대 크기의 헌책 전문 서점을 열었다. 이른바 ‘헌 교보문고’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공씨책방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는 광화문의 개미귀신굴을 아십니까. 책을 사랑하시는 분은 광화문을 지나치실 때 공씨책방을 조심하십시오.” 공씨가 직접 낸 팸플릿 ‘옛책사랑’에 쓰여 있는 홍보 문구다.

1980년대 후반 광화문 재개발로 공씨책방은 1992년 보금자리를 신촌으로 옮겼다. 1990년 공씨가 책을 가져오다 버스에서 쓰러져 뇌출혈로 별세했다. 장 대표는 그때부터 공씨책방을 책임지게 됐다.

신촌에서도 두 번 이사했다. 첫 번째 가게는 비좁은 지하실이었다. 조금만 일어서도 머리가 부딪힐 정도로 천장이 낮고, 책을 보관하기 너무 어려웠다. 지금 자리로 온 것은 1995년이다. “사람 부를 돈이 없어 직접 책을 운반했어요. 아는 분께 부탁해 용달차를 불렀고요. 이삿짐 나르는 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책 짐이거든요. 무겁긴 엄청 무겁고, 잘못하면 찢어지니까요. 그런 이사를 여러 번 하다 보면 무덤덤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면 그렇지도 않아요.”

장 대표는 “공씨책방을 운영하면서 헌책의 진정한 가치에 눈뜨게 됐다”며 “그래도 이모부의 열정과 안목에 비하면 난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헌책엔 ‘그날의 현재’가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요즘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게 유행하면서 복고 열풍이 대단하다는 걸 느껴요. 사실 저희 서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인문학 서적인데, 요새 들어서 1970~1990년대 잡지나 신문을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어요. 방송작가나 PD들이 자료 얻으러 온 적도 많고요. 우리 같이 오래 된 헌책방이 아니면 찾기 어려운 자료들이죠.”

장 대표는 “헌책방에 오는 손님을 보면 성향을 대강 파악할 수 있다”며 “들어오자마자 입구부터 살피는 사람은 최신 베스트셀러를 싸게 사고 싶어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 비해, 책방 안쪽으로 계속 들어오면서 뭔가를 열심히 찾는 사람은 확실히 문화적 소양이 남다른 이”라고 설명했다. “단골 손님이나 이곳에 와서 자료를 찾는 분들은 우리 책방을 ‘버려진 보물 창고’라고 불러요. 사실 저는 우리 가게에 책이 몇 권 있는지도 모르는데, 단골 손님들은 대략 10만권은 될 거라 합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 시대 열고파”

이사 가야 하는 심정을 물었다. “어느 곳이든 그곳으로 가면 그곳에서 새 시대를 열면 되는 것”이라는 담담한 답이 돌아왔다. 장 대표는 “헌책방에서 그저 책을 파는 것만이 아니라 손님들에게 책을 안내하고 함께 책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꾸리고 싶다”고 전했다. “사실 이사하는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저 많은 책을 언제 어떻게 다 옮겨야 할지는 정말 걱정돼요. 운반하는 과정에서 혹시 상하는 책이 나오면 곤란하니까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건 신경쓰지 않죠. 그냥 우리를 역사의 한 귀퉁이로 생각할 뿐이죠. 헌책방을 순례하며 사진 찍는 젊은 손님이 가끔 있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 만감이 교차해요.”

장 대표는 “헌책방을 ‘추억의 공간’이라 부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헌책방은 귀한 책과 기록이 살아 숨쉬는 생생한 공간입니다. 그냥 먼지나 털면서 한가하게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 이 안에 얼마나 많은 자료가 숨어 있을지, 얼마나 많은 보석이 숨어 있을지 모르잖아요. 전 그게 너무 아쉽습니다. 헌책방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최근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이 일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지요. 만약에 안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면 진작에 헌책방을 접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모부가 ‘그저 그런 책장사꾼’으로 살지 않으셨던 것처럼, 저도 그 정신을 본받고 싶어요.”

■ 플랫폼 변화 중인 헌책방

알라딘·예스24 등 '감각적 인테리어 매장' 잇따라

최근 헌책방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플랫폼이 변하고 있다. 대형 서점을 중심으로 온·오프라인 중고서적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헌책방이 자리 잡고 있다.

한경DB
한경DB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선 기업으로는 알라딘이 꼽힌다. 알라딘은 2008년 2월 인터넷서점 최초로 온라인 중고서점을 선보였고, 2011년엔 서울 종로에 오프라인 매장(사진)도 열었다. 알라딘의 오프라인 중고서적 매장은 전국에 23개가 있다. “헌책방은 분위기가 무겁고, 정신없다는 편견을 탈피해 깔끔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고객을 맞고 있다”는 게 알라딘 측 설명이다.

예스24는 지난 4월 강남역 부근에 오프라인 헌책방을 낸 데 이어 8월에는 목동점을 열었다.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등 기존 오프라인 대형 서점은 최근 잇따라 서점 내에 중고서적을 사들이는 매대를 늘리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이미 중고서적 직거래를 하고 있다. 출판사 관계자는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대형 온라인 서점이 마련한 오프라인 헌책방에 사람이 몰리고 있다”며 “베스트셀러를 원가보다 30% 정도 싸게 살 수 있는 데다 직거래도 더 활발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온·오프라인을 중심으로 한 이 같은 헌책방 플랫폼 변화가 장기적으로 동네서점 시장을 더욱 약화시키고, 출판업계에도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한 헌책방 운영자는 “큰 서점 체인들이 헌책까지 다 쓸어가니까 도무지 팔 만한 책이 나오지 않는다”며 “시대를 거스를 순 없겠지만 이렇게 가다 보면 지금보다 더 힘든 상황이 올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