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단 이사진과 함께한 徐회장 >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왼쪽 네 번째)이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경배 과학재단’ 출범식에서 재단 이사진과 함께 기자간담회를 준비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 재단 이사진과 함께한 徐회장 >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왼쪽 네 번째)이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경배 과학재단’ 출범식에서 재단 이사진과 함께 기자간담회를 준비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아모레퍼시픽(옛 태평양)이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은 1991년 5월이었다. 노동조합이 파업을 했다. 화장품이 잘 팔리지 않아 매출도 떨어졌다. 돈을 빌리기조차 어려웠다. 25일 뒤 파업은 끝났지만 회사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수익성 높은 태평양증권을 SK에 팔 수밖에 없었다.

고(故) 서성환 회장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새로운 투자를 시작했다. 경기 용인에 태평양 중앙연구소를 설립한 것. 서경배 회장은 당시 기획조정실장으로서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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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배 과학재단' 출범]  "20~30년 걸려도 세상 바꿀 과학자 키우겠다" 서경배의 대계
◆“과학기술이 삶의 질 바꿀 것”

서 회장은 당시 앞길이 캄캄했다고 했다.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말 강력한 상품을 한 번 만들어보자”고 다짐했다. 1993년 도전을 시작했다. 약의 원료로 쓰이는 비타민을 화장품에 써보자는 아이디어였다. 캡슐화 기술과 정확한 함량, 공기와 닿아도 산화되지 않도록 하는 기술 등이 필요했다. 4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1997년 3월 ‘아이오페 레티놀 2500’이 제품으로 나왔다. 이 제품은 한 달 만에 20만개가 팔리는 대형 히트상품이 됐다. 이 제품은 아모레퍼시픽이 이후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 회장은 “강력한 기술이 뒷받침된 제품 하나가 잘 팔리면 산적한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고 했다. 1990년대 암흑 같았던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무기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건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기술에 대한 집착이 인류의 삶을 바꿔줄 강력한 과학기술에 투자라는 꿈으로 이어진 시점도 이 즈음이었다.

◆“희망 없인 미래도 없어”

서 회장은 1일 과학재단 출범 기자간담회에서 ‘서경배 과학재단 이사장 서경배’라고 적힌 명함을 돌렸다. “젊은 과학자들이 마음놓고 인류 발전에 이바지할 기초과학 연구에 매달릴 수 있도록 장기적 지원을 해나갈 계획”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가 평소 “20세기는 패스트 팔로어가 발전을 이끌어왔다면 21세기에는 퍼스트 무버가 돼야 인류가 발전할 수 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서 회장은 “1997년 나온 그 제품이 20년 지난 지금까지도 회사 성장의 밑거름이 된 걸 보면 20년 뒤에 무엇이 세상을 바꿀지 누가 알겠느냐”며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면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재단의 목적은 젊은 기초과학 연구자들의 독창적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다. ‘특이점(singularity)’을 가진 과제, 생명과학과 관련된 연구를 최소 5년 이상 지원해줄 계획이다.

서 회장이 이사장을 맡고 김병기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강봉균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오병하 KAIST 생명과학과 교수 등 3명이 이사직을 맡았다. 매년 3~5명의 기초연구 수행자를 선발할 계획이다. 연구과제당 5년 동안 25억원을 지원해준다.

1차 서류심사에서는 뇌과학, 유전체·단백질체, 시스템·세포체, 노화, 면역·질병, 기타 부문으로 나눠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 2차 심사에서는 연구계획서의 실행 가능성과 연구자의 이력서 등을 검토한다. 오는 11월 처음 공고를 내고 내년 1~2월 과제를 접수한다. 3~4월 1차 심사, 5월 2차 심사를 거쳐 6월에는 최종 지원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100년 가는 과학재단 만들 것”

이 재단은 서 회장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첫 재단이다. 서 회장은 “개인 보유 주식 3000억원어치로는 20년가량 재단을 운영할 수 있다”며 “더 열심히 노력해서 사재로만 1조원을 채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혼자 시작했지만 뜻이 같은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면 10~20년 가는 재단이 아니라 50년, 10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아모레퍼시픽과 관련된 연구는 하지 않는다고 서 회장은 설명했다. “회사는 길어야 5년, 10년짜리 연구를 할 뿐 30년짜리 연구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길게 보고 가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기 전에 ‘최초의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를 보는 게 희망”이라고 덧붙였다.

민지혜/이수빈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