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채권단에 전향적 자세 요구 목소리 커져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시 산업 전반에 미칠 타격이 큰 것으로 분석되면서 한진그룹과 채권단 양쪽에 전향적인 자세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채권단은 한 개인 기업의 일로 여겨 원칙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해당 산업 전체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해운업계와 금융권에 따르면 채권단에 추가 자구안을 제출한 한진해운의 명운이 이번 주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까지의 정황을 보면 채권단은 그동안 유지해온 채무유예를 끊고 한진해운은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한 뒤 청산 절차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

채권단은 자구안을 받은 직후 이례적으로 내용을 공개하는 등 불만을 표시하며 압박 수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반면 한진그룹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며 더 이상의 자구 계획 마련은 어렵다고 토로한다.

채권단이 30일까지 자구안 수용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어서 앞으로 사흘이 양측이 이견을 좁힐 수 있는 마지막 기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채권단과 금융당국은 국민 혈세를 아낀다는 정부의 구조조정 원칙에 따라 한진해운에 추가 자금을 지원할 수 없으니 부족자금을 스스로 메우라고 요구해왔다.

특히 한진해운에 앞서 자금 투입 없이 자율협약에 들어간 현대상선의 선례를 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진그룹은 나름대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현대상선에 앞선 2013년부터 위기에 빠진 한진해운을 위해 1조원 이상을 투입해왔음에도 그 이상을 더 희생해야 하는 처지가 돼서다.

그룹 측은 한진해운 지원을 위해 2조원 규모에 달하는 알짜 자산이었던 에쓰오일 지분 28.41%를 전량 매각했다.

한진에너지 차입금 상환 등을 제외하고 남은 9천억원 중 대부분을 한진해운을 살리는데 쏟아 부었고, 대한항공은 유상증자 등을 통해 총 8천259억원을 지원했다.

이밖에 ㈜한진과 한진칼은 평택터미널과 신항만에 대한 지분 인수를 비롯해 노선 영업권, 상표권 매입 등으로 2천351억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여기에 이번 자구안에 포함된 5천억원을 합하면 그룹 차원의 지원은 1조7천억원가량이 된다.

현대상선과 자구 규모를 비교하려면 이런 노력을 전부 고려해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와 금융권이 한진해운에 유난히 '원칙'을 고수하는 배경에는 대우조선해양 사태의 학습효과가 자리 잡았다는 해석이 있다.

2000년대 이후 대우조선에 7조원이 넘는 국민 세금을 투입했음에도 부채비율이 7천300%에 이르고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자금 지원을 결정한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정부와 금융권이 이 같은 비난을 피하려고 한진해운 사태에 소극적이라는 시각이 많다.

아울러 정부와 금융권은 한진해운이 문을 닫더라도 경제적인 파급력이 크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산업은행 측은 물류 혼란 가능성에 대해 "현재 세계 해운시장에서 화물은 적고 선박은 많은 상태"라며 "선박이 없어서 화물 운송에 차질이 빚어질 상황이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단기적인 시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해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지금 같은 불황일 때는 외국 선사들을 활용해 화물을 실어나르면 되지만 2∼3년 후 업황이 좋아져 물동량이 늘면 선복량 부족, 운임 상승으로 인해 수송이 원활하지 않아 물류 대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양창호 인천대 동북아물류대학원 교수는 "외국이 어떻게든 국적선사를 살리려는 것은 바로 이런 때에 역할이 크기 때문"이라며 "당장은 별문제가 없을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 본다면 물류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 후 청산할 경우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수십년간 쌓아온 국가 네트워크를 한순간에 잃는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세계 6∼7위급인 한진해운이 보유한 전 세계 네트워크와 브랜드 명성을 무형적 가치로 따진다면 4조∼5조원이 될 것으로 추산한다.

이런 자산이 법정관리 신청 후 3개월이면 모두 사라지는 데다 이미 다른 선사와 6개월, 1년 단위로 계약한 화주들을 데려올 방법이 없어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기항지 이동에 따른 부산항의 물동량 급감, 조선업의 선박 발주량 감소 등 관련 업종에 대한 도미노식 타격은 이미 여러 차례 업계에서 우려를 제기한 바 있다.

양창호 교수는 "단지 자구책에 2천억∼3천억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수조원에 달하는 가치를 버리는 것이 맞는지 고민해봐야 한다"며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해운업 자체를 와해시키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양쪽이 더욱 신중히 접근하고 적극적으로 절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윤보람 기자 bryo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