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지리하다' 사망사건
2011년 8월22일은 한여름 더위의 끝자락이었다. 이날 국어심의회는 표준어 39개를 새로 확정했다. 그동안 음지에 있던 ‘짜장면’과 ‘먹거리’ ‘개발새발’ ‘손주’ 같은 말이 비로소 양지로 나왔다. ‘지리하게’ 이어지던 무더위뿐만 아니라 국민의 말글살이에서도 갑갑증을 한방에 날려버린 결정이었다.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88년은 우리 말글사에서 주목해야 할 해다. 이 해에 조선어학회에서 ‘맞춤법통일안’(1933년)과 ‘조선어 표준말모음’(1936년)을 내놓은 이후 우리말 규범에 최대 폭의 개정이 있었다. 그 와중에 우리말 ‘지리하다’가 사라졌다. 표준어로 ‘지루하다’만 쓰게 하고 ‘지리하다’는 버렸다. 공식적으론 ‘지리하다’가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언어에도 인수합병(M&A)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있던 말이 발음이 바뀌어 세력이 훨씬 커지면 그것 하나만을 표준어로 본다. ‘지루하다’가 ‘지리하다’를 집어삼킨 배경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다. 그런데 이 흡수통합은 다소 미진한 구석을 남겼다. 두 말의 쓰임새가 좀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늦가을 비가 밤새 지리하게 내렸다”, “수년째 ‘박스피 장세’가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다” 같은 말은 지금도 많이 쓴다. 이때 ‘지리하다’는 ‘질질 끈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지겹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의미 중심은 ‘오래 끈다’는 데 있다. 이에 비해 ‘지루하다’는 ‘따분하고 싫증나다’는 데 방점이 찍힌 말이다.

우리나라 사전의 개척자로 불리는 문세영 선생은 ‘지리하다’를 ‘시간이 오래 걸리다’로 풀었다(‘우리말사전, 1953년’).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사전’(1992년)도 비슷하다. 우리말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故) 정재도 선생은 ‘지리하다’를 아예 토박이말로 봤다. 한자어 ‘지리(支離·이리저리 흩어짐)’와는 뜻이 다르므로 억지로 한자를 가져다 써선 안 된다고 했다. ‘지리하다’가 퇴출되기 전 우리 사전들이 그 말밑을 한자 ‘支離’로 본 것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었다.

얼마 전 광복 71주년을 앞두고 특별사면·복권이 있었다. 말글에서도 더 늦기 전에 변방으로 숨어든 ‘지리하다’의 복권을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