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수경 기자]
영화 ‘터널’ 감독 김성훈 / 사진=조준원 기자 wizard333@
영화 ‘터널’ 감독 김성훈 / 사진=조준원 기자 wizard333@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눈 깜짝할 새에 무너져버린 터널 속에 35일 동안이나 갇혀있어야 했던 ‘터널’ 속 정수(하정우)는 아마 이 말을 내내 가슴에 되새기고 있지 않았을까.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 시의 한 구절은 영화 ‘터널’을 관통하는 메시지와 궤를 같이 한다.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며, 행복해질 것이라 기대하는 순간 불행이 찾아왔을 때에도 눈물보다는 웃음을 짓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아이러니에 맞선 정수의 이 아이러니한 선택은 터널 밖에서 펼쳐지는 블랙 코미디와 함께 ‘터널’이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하도록 이끈 원동력이 됐다. ‘역경을 딛고 구조에 성공한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서사 속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웃음과 의미가 담겨있었다. 어떠한 장르가 됐든 유머라는 장치를 계속 쓰고 싶다던 김 감독은 이 영화가 뙤약볕 아래 잠시 쉬어가는 그늘 같은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0. 개봉 이후 연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예상했나.
김성훈: 어떻게 될 지 전혀 몰랐다. 1등을 한 것에 기쁘고 언제까지 갈 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을 즐기고자 한다.

10. 배우 하정우가 원래는 당근과 초코 케이크를 좋아하고 생크림 케이크는 잘 안 먹는다고 얘기했는데 영화에는 생크림 케이크가 등장한다. 그 이유는.
김성훈: 재난 상황에 갑자기 처하게 됐을 때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과 먹기 싫은 것을 행복해하면서 먹는 것에는 미세한 차이지만 다른 느낌이 있을 것 같았다. ‘터널’이라는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러니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그 아이러니 중 하나이지 않을까.

10. 감독님의 영화에서는 ‘만약’이라는 모티브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그것이 ‘김성훈 감독 영화’를 재밌게 하는 차별화 요소다.
김성훈: 주위를 둘러보면 빛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어둠도 있다. 그게 자연의 이치이고 조화다. 불행과 행운이 같이 존재한다는 것. 영화 초반부에서도 정수(하정우)가 처음 주문했던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결과론적으로 말해서 그것에 미워해야 될 지 고마워해야 될 지는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다.

예전에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며 발생하는 결정의 순간,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며 둘 중 하나를 고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냐를 지켜보는 내용이다. 순간의 선택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다. 참 재밌었는데.(웃음) 그렇게 끊임없이 두 가지 정반대의 상황에 놓이는 것들이 내겐 재밌는 것 같다.

10. 음악 선택 또한 절묘했다. ‘끝까지 간다'(2013)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이 나왔는데 이번에도 그의 다른 음악이 터널 안에 울려퍼졌다. 평소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건가.
김성훈: 많이 듣는 편은 아니다. 아는 음악가가 별로 없어서.(웃음) ‘끝까지 간다’에서는 상당히 유용하게 썼다고 생각이 든다. 음악도 워낙 좋았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이번에는 쓰되 좀 더 사람들이 모르는 곡을 쓰고 싶었다. ‘터널’에 나온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상당히 어려운 곡이라고 하더라. 나는 ‘정수가 이런 것도 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귀여운 장난이지.(웃음) 그 안에서 정수가 계속 클래식만 듣다 보니까 나름대로의 학습이 된 거지.

10. 가수 거북이의 노래도 참 찡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김성훈: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부터 그 노래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사전에 밝히면 많은 반대에 부딪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음악은 너무나 주관적이고 취향을 많이 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논리가 개입되기 시작하면 어려워진다. 그래서 안 밝히고 있다가 후반 작업할 때 음악 감독한테 살짝 느리게 편집해달라고 했다. 세현(배두나)이 정수에게 신나는 노래를 들려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밝은 노래가 구슬프게 들렸으면 했다. 클래식과도 대비됐으면 했다. 무엇보다 그 ‘거북이 신’을 완성시켜준 것은 정수였다. 정수의 눈에 눈물이 맺히다 끝나는데, 그 순간의 얼굴이 너무 좋았다.

감독 김성훈 / 사진=조준원 기자 wizard333@
감독 김성훈 / 사진=조준원 기자 wizard333@
10. 정말 하정우가 극을 이끌어가는 힘이 대단했다.
김성훈: 준비도 굉장히 많이 해 올뿐더러 현장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배우다. 정수 역은 공간과 연기하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주변 공간이 삐걱 소리를 낼 때도 있고, 의도치 않게 뭔가와 부딪힐 때도 있고 하지 않나. 그럴 때마다 하정우는 항상 무언가를 한다. 계획대로 안 되면 NG낼 수도 있는데 하정우는 상황이 틀어져도 절대 중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황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목 받침대 신은 원래 계획에 없던 장면이었다. 나도, 스태프들도 목 받침대가 그렇게 길 줄 몰랐다. 하 배우가 목 받침대를 뽑으려다가 “어, 이거 왜 안나와”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역으로 응용했다. 연기를 한다기보다 정말 터널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사람 같았다. 실제 터널 안에 갇혔는데 ‘NG’하고 커트할 수는 없지 않나. 그 때 하정우는 갇힌 터널 속에서 첫날 밤을 지새우려고 하는 남자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이미 대단한 줄 알았지만, 촬영하면서 왜 대단한지 알겠더라. 내가 모르는 그 대단함이 더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 영화 ‘신과 함께’에서도 무언가가 나올 거라고 기대된다.

10. 정우가 터널 속에서 만나게 되는 소녀 민아 역을 연기한 배우 남지현은 어땠나.
김성훈: 준비도 철저하게 해 오지만, 하정우가 애드리브를 치면 그것을 다 받아낸다. 집에서 준비한 대로 해오는 것도 어려운 데, 그렇게 유연하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 나 할 것만 해서 연기가 따로 놀 때도 많다. 우리 ‘터널’ 배우들 중에는 없지만.(웃음) 스물두 살에 보기 힘든 여유를 가진 친구라고 생각했다. 아직 대학교 3학년인데 민아 연기하면서 학교 시험도 착실하게 준비했다고 들었다. 내 스물두 살을 심히 반성하게 됐다.(웃음) 어린 친구지만 배우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배울 것이 많았다.

⇒인터뷰②에서 계속됩니다.

김수경 기자 ksk@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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