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캐리 언니처럼 2층집을 만들었어요. 여기서 같이 놀아요. 사랑해요 언니! 제 글에도 댓글 달아주세요.”

직장인 김재원 씨(37)는 최근 여섯 살 아이에게 휴대폰을 줬다가 깜짝 놀랐다. 아이가 하루 종일 유튜브 방송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사진)을 보며 휴대폰과 얘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장난감 박스에 처박혀 있던 레고를 꺼내 집을 만드는가 하면 인형놀이하며 ‘캐리 언니’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김씨는 “요즘 유치원생 사이에선 뽀로로보다 ‘캐통령’(캐리+대통령)이 인기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며 “놀이터에서 또래를 만난 우리 세대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1인 방송을 보며 친구를 사귄다”며 신기해했다.

문화계에 ‘키즈 콘텐츠 열풍’이 불고 있다. 애니메이션, 어린이 공연 등은 물론 주문형 비디오(VOD), 유튜브 1인 방송 등 성인용이라고 생각한 문화시장까지 영유아 콘텐츠가 점령했다. 전문가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상 콘텐츠와 모바일 기기에 익숙한 ‘모모(More Mobile) 세대’와 불황에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지갑을 여는 부모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래픽=전희성 기자 lenny80@hnakyung.com
그래픽=전희성 기자 lenny80@hnakyung.com
국내 유튜브 1인 방송, 상위 5개 중 4개가 어린이 채널

유튜브 통계 분석기관 비드스태트엑스에 따르면 국내 1인 방송 중 누적 조회 수 상위 5개 채널 가운데 4개가 장난감 언박싱(unboxing), 색점토 만들기 등 유아용 채널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중에 판매하는 장난감 포장을 뜯어 조립 과정을 보여주거나, 형형색색의 점토를 갖고 놀며 놀이법을 알려주는 방송이다. 1위인 ‘토이푸딩’은 누적 조회 수 28억뷰를 넘어섰다. ‘토이몬스터’는 해외 시청 비중이 98%가 넘는다. 댓글은 대부분 외국어로 돼 있다. 어린이 방송은 언어와 문화 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대도서관’ ‘김이브’ ‘밴쯔’ 등 한 달에 수천만원 이상의 유튜브 광고 매출을 올리며 억대 연봉자 반열에 오른 게임·먹방·미용 VJ가 운영하는 채널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전문가들은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심영섭 문화평론가는 “요즘 아이들은 놀이터나 골목길에서 뛰어 노는 대신 갓난아기 때부터 모바일 기기로 친구를 사귄다”며 “혼자서도 인터넷을 통해 늘 다른 집 아이들과 연결돼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원숙 캐리소프트 대표는 “말도 못하는 아기들이 비디오를 본 뒤 자판을 마음대로 눌러 뜻도 모를 ‘외계어’로 댓글을 남기고 ‘좋아요’ 혹은 ‘싫어요’로 의사를 표시한다”며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환경에서 생활하는 ‘디지털 네이티브’의 사고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의 적은 애니메이션

['컨슈머 키즈' 시대] '캐통령'을 아시나요…1인 방송·VOD까지 좌지우지하는 아이들
극장가는 애니메이션 전성시대다. 여름방학을 맞은 7~8월은 ‘도리를 찾아서’ ‘마이펫의 이중생활’ ‘아이스 에이지: 지구대충돌’ 등이 극장가를 장악했다. 디즈니를 포함해 수많은 제작사가 애니메이션 제작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문화적 차이가 적어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고, 어린이·부모 세대·키덜트족까지 모두 공략할 수 있어서다.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은 유치하다’는 편견을 뒤엎으며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다. 올 상반기 세계 박스오피스 5위까지 흥행작인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11억5220만달러) ‘주토피아’(10억2320만달러) ‘정글북’(9억4770만달러) ‘도리를 찾아서’(9억90만달러)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8억7270만달러) 중 3개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캡틴 아메리카’를 포함해 디즈니의 올 상반기 미국 극장 점유율은 28.9%에 달한다.

‘애니메이션의 적은 또 다른 애니메이션’이라는 말도 나온다. ‘마이펫의 이중생활’은 3주 연속 1위였던 ‘도리를 찾아서’를 제치고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미안해 증후군’에 지갑 여는 부모들

아이와 충분히 놀아주지 못하는 맞벌이 부부의 ‘미안한 마음’은 곧 소비로 이어진다. 유료로 이용하는 VOD 서비스에서도 이런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올 상반기 KT가 가입가구 650만여명인 올레tv 시청자의 VOD 이용점유율을 조사한 결과 ‘키즈·애니메이션’ 콘텐츠가 34.4%(2위)로, 1위인 TV 다시보기(37.6%)와 근소한 차로 2위를 차지했다. 음악(8.4%) 영화(7.5%) 스포츠(1.4%) 성인(1.2%) 등 성인 콘텐츠를 모두 합친 것의 두 배에 육박한다.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서라면 리모컨을 양보하기 때문이다.

통신회사가 어린이 콘텐츠 독점 방영권 확보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SK브로드밴드는 뽀로로를, KT는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업체 드림웍스 채널 독점 방송을, LG유플러스는 마블·스타워즈 시리즈를 독점 방송하고 있다. KT 관계자는 “지난 3년간 콘텐츠 관련 민원 중 가장 많은 것이 ‘왜 올레tv에서는 뽀로로가 나오지 않느냐’였다”며 “어린이 콘텐츠는 IPTV 가입자 확보를 위한 주요 격전지”라고 설명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