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수경 기자]
영화 ‘부산행’ 스페셜 포스터 / 사진제공=NEW
영화 ‘부산행’ 스페셜 포스터 / 사진제공=NEW
‘블랙 스완’. 검은 색깔을 가진 백조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예외적이어서 발생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다. 지난 7일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부산행’은 마치 흑조가 날갯짓을 하듯,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변을 일으켰다.

먼저 장르 영화로써 놀라운 쾌거를 보여주며 한국 장르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부산행’이 한국에서 제작된 첫 좀비 영화는 아니다. ‘괴시'(1980)에서 시작해 ‘이웃집 좀비'(2010), ‘인류멸망보고서'(2012), ‘신촌좀비만화'(2014), ‘좀비스쿨'(2014) 등 90년대에 맥이 잠깐 끊겼던 좀비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 이르러 되살아난 조짐을 보였다. ‘부산행’은 이에 좀비 블록버스터를 표방했지만 그 안에는 열매가 알알이 들어찬 구성과 연출로 한국 좀비 영화, 또는 재난 영화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

‘부산행’만의 독특한 전개 방식과 섬세하고 완성도 높게 짜여진 좀비 액션은 연출자의 덕이다. 원래 애니메이션 연출자였던 연상호 감독이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것. 이처럼 태생부터 이색적이었기 때문에 ‘부산행’은 영화계 안팎에서 흥행에 대한 우려도 컸다. 하지만 연 감독만의 만화적 상상력은 ‘부산행’에 그만의 색다른 색채를 입히는데 일조했다. 그는 달리는 열차의 속도감을 생생하게 유지하면서도 인물들이 한 명씩 스러져가는 장면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며 ‘비주얼 마스터’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두 시간 가까이 펼쳐지는 이 좀비 블록버스터에서는 KTX가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지분을 차지한다. ‘대한민국에서 운행 중인 유일한 초고속 열차’인 KTX는 그 자체로 한국적인 특색이 강한데다, 달리면서도 밀폐된 공간이라는 점이 러닝 타임 내내 긴장감을 부여하게 만드는 장치다. 이목원 미술감독의 손길은 스크린을 통해 전해져오는 긴장감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었다. 부산역, 대전역, 동대구역 등 영화 콘셉트에 맞는 플랫폼과 펜타그래프가 없는 역사를 직접 찾아 나서며 리얼리티에 충실한 미장센을 연출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도입한 LED 후면 영사 기술 또한 영리한 선택이었다. ‘부산행’에서는 열차가 계속 달리기 때문에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연출하는 것도 넘어야할 산이었다. 할리우드 제작 방식처럼 CG로 처리하기에는 수많은 작업이 필요해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야만 했던 것. 이에 이형덕 촬영감독은 LED 후면 영사 기술로 열차와 함께 달리는 풍경을 연출해내며 비용 감축과 속도감과 리얼한 현장감을 동시에 잡았다.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이 좀비들과 벌이는 액션 신도 지루할 틈이 없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사투라 더욱 생동감 있고, 터널을 통과하며 번갈아 마주치게 되는 빛과 어둠은 또 다른 스릴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마치 만화처럼 각 캐릭터의 능력을 극대화한 액션 설정이 흥미롭다.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석우(공유), 상화(마동석), 영국(최우식)은 각자의 무기를 가지고 좀비들을 상대한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표현된 좀비의 움직임도 흥행의 일등공신이었다. ‘곡성’에서 좀비의 움직임을 연출했던 박재인 안무가는 각자의 캐릭터를 연령대별, 성별, 움직임의 속도 등으로 좀비 배우들을 1차 분류한 후, 다시 내부, 외부, 선로 위 등 장소별로 분류했다. 또한 객차 안이라는 작은 공간 속 감염자는 눈이 안 보이는 대신 귀가 예민해지기 때문에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작을 구현했다. 열차 외부의 감염자도 신경썼다. 열차와 열차 사이 철로의 자갈들 위에서 뛰어 다니는 모습,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까지 세부적인 움직임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작업 방식을 택했다.

재난 영화에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특수 인물’이 없다는 것도 색다르다. 연상호 감독은 대통령이나 특수 부대 요원 등 ‘영화적 인물’ 대신 직장인, 고등학생 등 일상적 인물을 캐릭터로 설정했다. 우리 주변에 충분히 있을법한 인물들의 삶에 갑자기 덮쳐오는 재앙은 이러한 현실성으로 인해 두 배로 더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동시에 어쩌면 나와 닮은 인물들이 극한의 상황에 던져졌을 때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변모의 과정이 선(善)으로 갈 지, 악(惡)으로 갈 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연 감독은 사회 풍자적 메시지까지 우아하게 담아냈다. 영화 속 정부는 이미 좀비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유를 폭력 시위에서 찾는다. 원인을 파악해 국민들에게 문제를 신속하게 알리는 대신 자극적인 ‘폭력 시위’ 현장에만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 채 “정부를 믿고 따라 달라”라는 문구만 반복한다.

‘블랙 스완’의 저자 니콜라스 탈레브는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고 말했다. 좀비나 재난 영화의 공식 중 다소 진부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과감히 삭제하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섬세한 액션을 통해 인간상과 사회성을 생생하게 그려낸 ‘부산행’은 찰나의 가능성으로 흥행의 판도를 바꿨다. ‘부산행’이 펼친 날갯짓이 앞으로 한국 장르 영화에도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김수경 기자 ksk@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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