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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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고급 주택 계단에서 한 청년이 끙끙대고 있었다. 자기 몸보다 훨씬 큰 냉장고를 등에 지고 계단을 더 올라가지도, 다시 내려가지도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청년은 큰 뜻을 품고 갓 결혼한 아내와 유학길에 올랐다. 단돈 3000달러만 쥐고 건너온 미국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유학 일정이 예정보다 늦어진 탓에 장학금도 물거품이 됐다. 시급 5달러짜리 아르바이트로 한 주 한 주를 힘들게 버텼다. 아내는 “시장에서 20달러어치 장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맺혔다. KT 사장을 거쳐 지난해 12월부터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이끌고 있는 이상훈 원장의 이야기다.

5달러 시급 알바하며 美유학

기업인 출신으로는 첫 ETRI 원장에 오른 그를 경기 성남시 금토동에 있는 육미한우암소직판장에서 만났다. 분당에 집이 있는 그는 “먹성이 좋은 세 아들과 함께 고기가 먹고 싶을 때 자주 찾는 단골집”이라고 소개했다. 여러 메뉴 중에서 치마살과 토시살, 부채살, 제비추리 등으로 구성된 특수부위를 주문했다. 입안을 한가득 채울 만큼 큼지막하게 썰어져 나온 고기에서 직판장 특유의 신선함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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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지기 집안에서 태어난 이 원장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다. 하지만 이 원장은 부친의 사업 실패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다섯 형제 중 셋째로, 큰형인 이종희 모다정보통신 회장을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존경한다고 했다. ‘말과 행동이 늘 일치하는’ 큰형이 하는 일이 모두 좋아 보여 대학과 대학원, 첫 직장까지 모두 큰형의 뒤를 따라갔다. 전기공학을 전공한 것도 “앞으로 컴퓨터와 통신이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는 형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형의 권유로 제대 후에는 유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유학을 가느냐 돈을 버느냐의 갈림길에 놓였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나섰다. “유학비를 대주지 못해 가슴이 아픈데 유학까지 포기해서 가슴에 대못까지 박느냐”고 나무랐다.

준비 없이 떠난 유학은 고행길이었다. 허드렛일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다. 평일에는 ‘납땜 기판’을 만들고 주말에는 이삿짐을 날랐다. 5일을 꼬박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은 400달러를 넘지 않았다. 하루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기계로 기판을 가공하는 일을 하다 손을 다쳤다. 손톱의 반이 날아갔고 피가 철철 흘렀다. 한여름에 상처가 덧나면서 금세 팔이 퉁퉁 부어올랐다. 유학생 부부에겐 수술은커녕 병원에서 치료할 돈도 없었다. 혼자서 상처를 째고 고름 섞인 피를 쏟은 뒤에야 겨우 진정됐다. 부부는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힘들게 1년을 버티자 못할 게 없었다고 했다. 남들은 5년 넘게 걸리는 석사와 박사 과정을 3년9개월 만에 마쳤다.

“상식은 모든 걸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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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점의 고기가 숯불 위에서 맛있게 익어갔다. 이 원장은 너무 자주 고기를 뒤집으면 맛이 없다고 했다. 미국 생활 이야기를 이어갔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첫 직장을 형이 다닌 벨 연구소로 잡았다. 세계 최고 권위의 통신 연구소인 벨 연구소는 당시 통신 분야의 수요 증가로 몸집을 불리던 때였다.

연구소 측은 어떤 연구를 하라는 얘기 없이 모든 걸 자율에 맡겼다. 함께 연구하는 동료들은 대부분 전기전자 분야의 세계적 학회인 국제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 펠로이거나 전자공학 교과서에 이름이 등장하는 쟁쟁한 연구자였다. 당시만 해도 그의 평생 꿈은 IEEE 펠로가 되는 것이었다.

매일 밤 11시가 넘어 퇴근했지만 좀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첫 1년간은 논문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체통에서 편지를 꺼내던 그의 머리에 번개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편물을 규격봉투에 넣듯 대량의 데이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목적지 주소를 붙여 전송하는 것이다. 한동안 브로드밴드 표준이던 비동기식 전달 방식 교환기(ATM) 개념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아이디어는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연구소 전체 연구원이 참석해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뜻밖의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그게 무슨 연구냐는 지적이었다.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뜻밖의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의 상사였다. “상식은 모든 것이다. 상식이 모든 걸 바꾼다”며 오히려 모두 앞에서 그를 칭찬했다. 이후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2년 만에 ATM은 표준이 됐다. 지금은 IP 방식에 자리를 내줬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수천억원을 벌어들였다.

1991년 귀국을 앞둔 그는 고민에 빠졌다. 부모님 뜻에 따라 대학교수가 될지, 대기업에 취업할지 선택의 갈림길에 있었다. 때마침 국내 광대역 인터넷 보급을 추진하던 이해욱 당시 한국통신(KT 전신) 사장으로부터 일자리를 제안받았다. 공기업 연봉이 미국에서 받는 연봉의 절반도 안 되는 시절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그는 KT를 선택했다. 통신 엔지니어로서 직접 네트워크를 깔아보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그는 “지금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보다는 몇 년 뒤 다시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라”고 강조했다.

“경영 능력 인정받은 건 직원들 덕분”

인기 메뉴인 특수부위 한 접시가 더 나왔다. 이 원장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뒤집었다. 도톰한 고기가 입안을 한가득 채웠다. 입안에 넣고 씹자 달콤한 맛의 육즙이 스며 나왔다. 수많은 연구자 중에서 경영인으로 발탁된 배경을 물었다.

2003년 KT 연구개발본부장을 맡고 있을 때 인터넷 대란이 일어났다. 당시 그는 연구 분야를 총괄했지만, 사태 수습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연구원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기간망본부장 직책을 맡았다. KT의 전통 사업인 전화망 수익이 줄면서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시기였다. 대규모 인력을 초고속 인터넷 분야로 전환해야 했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당시만 해도 평생 처음 인터넷을 접한 엔지니어가 많았다. 네트워크 쪽 직원들은 업무 특성상 보수적인 면도 많았다. 부산의 한 지역본부에서 생겨난 한 공부 모임이 변화의 불을 댕겼다. 이를 본떠 다른 지역에서도 공부 모임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원장은 “마치 불길처럼 번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잘 따라준 직원들 덕분에 현장을 혁신하는 능력을 회사로부터 인정받았고, 훗날 경영에 참여하게 된 것 같다”며 “혁신은 외부 인물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 구성원들이 스스로 해야 성공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정부·연구소가 4차 산업혁명 마중물 만들어야”

1976년 설립된 ETRI는 정보, 통신, 전자, 방송 및 관련 융복합 기술 분야의 산업 원천기술 개발을 담당하는 정부 출연연구기관이다. 이 원장은 얼마 전 20대 국회의원들 앞에 섰다. 세계적으로 부는 제4차 산업혁명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IT산업의 격동기를 이끈 그의 설명은 명쾌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 ‘물리적 지구’에서 기업들은 원가 절감과 품질 향상을 하면 됐다. 한국은 선진 기술을 빨리 습득해 추격하는 패스트 팔로 전략을 선택했고 휴대폰, 반도체, 가전에서 세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월드와이드웹이 등장한 이후 열린 ‘사이버 세계’에서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사이버 세계에 땅을 사 집을 지었고, 주소까지 받았다. 시간이 더 흘러 이제는 사이버 세계 기업들이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우버는 세계 최고 택시회사지만 택시는 한 대도 없다. 구글의 유튜브, 페이스북은 최고 콘텐츠 회사지만 직접 콘텐츠를 만들지 않는다. 봉이 김선달과 같은 사업가들이 여기저기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원장은 “이제는 내가 사이버 세계에서 한 일이 곧 글로벌이 되는 시대가 됐다”며 “근본적으로 생각의 DNA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에서 한국 정보통신기술(ICT)산업이 나아갈 방향을 물었다. 그는 “인공지능, 빅데이터와 결합한 의료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원장은 “한국은 여전히 앞선 인프라가 있고 새 기술을 빨리 흡수하는 5000만명의 훌륭한 테스트베드가 있다”며 “정부와 ETRI 같은 연구소가 빅데이터와 마중물만 만들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IT강국 한국 이끈 주축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오늘날 한국이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떠오르는 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국내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전전자교환기(TDX) 개발, 반도체산업의 첫걸음을 뗀 4M D램 제작, 세계 최초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 상용화 등 굵직한 성과를 냈다. 지금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5G 기술과 8개국 언어 통역 서비스 기술을 선보이기 위한 연구가 주력 과제다.

민간기업이 IT산업을 주도하면서 최근 ETRI가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이상훈 원장은 “ETRI가 초연결·초지능 사회로 대변되는 제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굵직한 성과를 내려면 연구 환경이 안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상훈 원장의 단골집 육미한우암소직판장
한우 특수부위 500g 4만원대…깔끔한 맛 갈비탕도 인기

[한경과 맛있는 만남] 이상훈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 한국의 통신망 설계한다는 자부심에 세계 최고 미국 벨연구소서 KT행 결심
2009년 경기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 문을 연 한우 전문 구이집이다.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향 대왕판교IC를 빠져나와 좌회전하고 200m가량 가면 왼쪽에 간판이 보인다. 분당 주민들 사이에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뛰어난 고깃집으로 입소문이 나 있다.

모든 메뉴는 한우 암소만 사용한다. 숯불에 구워 먹는 등심과 안심이 500g에 각각 4만5000원과 4만9000원이다. 두세 명이 10만원이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치마살과 토시살, 부채살, 제비추리 등으로 이뤄진 특수부위(500g에 4만9000원)가 인기 메뉴다.

육회(한 접시 1만6000원)와 맑고 깔끔한 맛의 갈비탕(7000원)도 별미다. 고기를 먹고 갈비탕을 포장해 가는 손님이 많다. 평범한 동네 고깃집처럼 보이지만 언제 가도 신선한 고기를 싸고 배부르게 먹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평가가 많다. 점심과 저녁 식사 때는 자리를 잡기 힘들다. (031)713-9190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