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29) F.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짧고 단순하지만 아름답고 깊다

《독일인의 사랑》은 비교언어 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동양학자인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가 남긴 단 한 편의 소설이다. 1856년에 쓴 100페이지 남짓한 얇은 책에 어떤 내용을 담았길래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풍부한 감수성과 시적인 문체로 감성을 촉촉하게 적시는가 하면 독일 신학과 철학, 동양학으로 이성을 일깨우기 때문인 듯하다. 단순한 스토리에 담긴 짧은 내용이 때로는 로맨틱하게, 때로는 심오하게 ‘사랑’을 그리고 논하면서 독자의 가슴을 두드린다.

[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29) F.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애초에 시인이나 음악가가 되길 원한 막스 뮐러는 분명 독일의 낭만파 서정시인인 아버지 빌헬름 뮐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빌헬름 뮐러가 쓴 연작시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와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가 곡을 붙일 정도로 유명하다. 막스 뮐러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언어학자의 길을 걸으며 그 분야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소설 속에 ‘스피노자의 소름 끼치게 완벽한 논증을 보면, 그 날카로운 사상가는 자신의 학설을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꼼꼼한 증명에 매달리는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되거든’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자신의 학문적 경험이 작품에 다수 담겨 있다.

막스 뮐러는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같은 쉽지 않은 언어를 익혔다. 고대 인도의 문화와 언어에도 깊은 관심을 둬 인도 우화집과 경전을 번역했으며 산스크리트어로 쓴 서정시를 독일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동서양을 넘나드는 막스 뮐러의 관심이 어느 부분에 녹아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첫눈에 반한 소녀와 결혼

[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29) F.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언어학자인 그가 왜 소설 쓸 생각을 했을까. 1850년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에 강의 교수로 초빙돼 문학사와 비교독문학을 강의하게 됐다. 3년 뒤인 30세 때 당시 열아홉 살이던 영국 소녀 애들레이드를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대단한 귀족 딸인 애들레이드와의 만남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결국 나이, 신분, 국적, 종교의 벽을 넘어 결혼했다.

《독일인의 사랑》에서 평범한 ‘나’가 좋아하는 마리아도 영주의 딸이라는 높은 신분에 속했다. 소설 속의 ‘나’는 갈등을 느끼고 주변의 반대로 인한 아픔을 겪는다. 막스 뮐러는 애들레이드를 사랑하면서 ‘사랑의 조건’에는 무엇이 있으며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 상념의 결실을 《독일인의 사랑》에 고스란히 담았다. 작자 미상으로 출간한 《독일인의 사랑》은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고, 1877년 아내 애들레이드에 의해 영어로 번역 출간됐다.

소설은 여덟 개의 회상으로 구성돼 있다. 유년 시절 얘기를 담은 세 번째 회상까지는 동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교회보다 더 크고 첨탑도 여럿인 거대한 저택’에 방문해 후작부인을 만난다. 어머니께 하듯 아름다운 후작부인에게 목을 안고 볼에 입을 맞춘 나는 집에 와서 아버지께 ‘그분은 남이고 신분이 높은 분이니 조심해야 한다’며 야단맞는다. ‘좋아하는데 마음을 드러내면 안 되는 그 ‘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데서 나의 성장이 시작된다.

후작의 저택에 자주 놀러가게 된 나는 어느 날 심장병으로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 마리아를 만난다. 그녀를 보면서 ‘저 소녀도 역시 남일까?’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생일을 맞은 마리아가 동생들에게 반지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견진성사도 받았으니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기꺼이 갈 수 있게 됐어”라고 말할 때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껌뻑거린다. 그녀가 나에게 반지를 주려 할 때 “이 반지는 날 주지 말고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어. 네 것은 모두 내 것이니까”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만남…먹먹한 이별

이근미 < 소설가 >
이근미 < 소설가 >
이 운명적인 말로 두 사람의 마음은 연결되고, 성인이 돼 재회한다. 마리아가 ‘친애하는 친구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내 성으로 초대한 것이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의 마음과 그간 쌓은 지성을 폭넓은 대화로 풀어낸다.

마리아는 숨김없이 자기 생각과 느낌을 얘기하건만 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열어 보이지 못한다. 끊임없이 속마음을 숨기라고 요구하는 사회에 익숙해진 스스로가 못마땅한 나는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여러 편의 ‘시’를 마리아에게 들려준다. 나와 마리아가 인용하는 시를 읽기만 해도 독서의 보람을 느낄 것이다.

병약한 마리아와의 재회는 나에게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해주지만 둘은 아버지의 반대로 이별한다. 결국 나는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뒤 반지와 ‘네 것은 모두 내 것이야. 너의 마리아로부터’라는 편지를 받는다.

짧지만 진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 단순하지만 심오한 상념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 《독일인의 사랑》이다. 이 책이 ‘조건이 우선 되는 만남, 이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세태’에 깊은 경종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