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석의 데스크 시각] 조선산업 이후 길을 묻다
작년 말 금융위원회 고위 관계자에게 “조선산업 구조조정은 안 할 거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답변은 솔직했다. “구조조정 방안은 다 짜놓았다. 수만 명의 대량 실업이 불가피한 만큼 4·13 총선 직후에 착수할 예정이다. 조금만 기다려 보라.”

총선이 끝난 뒤에도 두 달이나 미적대던 정부가 지난주에야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알맹이는 없었다. 부실 조선사인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특단 조치나 조선산업 구조재편 방안은 안 보였다.

한국 조선업의 위기는 세계 경기둔화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조선소가 절대 공급과잉인 데다 구조적으로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걸 부인하는 전문가는 없다.

구조적 위기인 한국 조선산업

배 건조하는 일만 40년 했다는 정성립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2000년대 조선업 호황기에 너도나도 늘린 도크가 지금은 30% 이상 과잉”이라고 고백했다. 호황기 10년간 두 배 이상 치솟은 조선소 근로자 임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은 평균 7826만원의 연봉을 받았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자 평균 연봉 7149만원(2014년 기준)보다 10% 정도 많다.

해양플랜트 등 기술집약적 부문도 있지만 조선업은 본질적으로 노동집약 산업이다. 임금이 경쟁력의 밑바탕이다. 조선소 근로자 평균 연봉이 1000만~1500만원인 중국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조선산업은 유럽이 일본으로, 일본이 한국으로 바통을 넘겼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철판을 자르고 붙이고 칠하는 조선업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나라에선 경쟁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중국에 조선산업을 넘겨주고 나면 거제와 울산엔 그야말로 실업자가 넘쳐날 것이다. 이런 위기를 앞선 조선 강국들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14년 전 조선산업이 쇠락해 초대형 크레인이 현대중공업에 1달러에 팔려 가면서 ‘말뫼의 눈물’이란 말을 낳았던 스웨덴 남부 항구도시 말뫼. 이곳은 지방정부와 산업계가 합심해 신재생에너지와 정보기술(IT) 바이오산업을 키웠다. 말뫼는 조선업을 포기하면서 2만8000여개의 일자리를 잃었지만 새 산업이 싹트면서 200여개의 신생 기업과 6만3000여개의 새 일자리가 생겼다고 한다.

거제와 울산을 신산업 메카로

환부를 도려내고 새살을 돋게 하기까지는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고통을 두려워해선 산업구조 개편도 혁신도 불가능하다. 1980년대 미국의 금융산업, 1990년대 IT 벤처붐, 2000년대 바이오산업도 기존 산업 불황이 밑거름이었다. 절박해야 혁신도 일어난다.

조선산업 재편도 급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이후다. 정보통신기술(ICT)이 전통 제조업을 탈바꿈시키는 4차 산업혁명 시대다. 미래 산업구조의 밑그림을 먼저 그리고 조선산업을 재편하는 게 순서다. 거제와 울산이 인공지능 로봇 생명과학의 메카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정부는 신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규제부터 확 뜯어고쳐야 한다. 드론(무인항공기) 택배, 의료용 앱(응용프로그램) 판매, 익명 위치정보 빅데이터 활용, 비트코인 거래, 개인 대 개인(P2P) 대출 등 모든 창조적 행위가 기존 법에 없으면 불법인 현실에선 신산업이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 지금이야말로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차병석 산업부장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