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8년 만에 대기업집단 지정기준을 자산총액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높이고 지정기준을 3년마다 재검토하겠다고 어제 발표했다. 또 한전, LH, 도로공사 등 12개 공기업은 대기업 집단에서 제외키로 했다. 이로써 65개에 달하는 대기업 집단은 28개로 줄어들게 됐다. 지난 4월 초 신규 지정된 하림, 셀트리온, 카카오 등은 다시 재벌 명찰을 뗄 수 있게 됐다. 경제계도 일단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2009년 자산 2조원에서 5조원으로 높인 이래 경제규모가 49.4% 커지고, 대기업집단 자산은 평균 144.6%나 불어났다. 그럼에도 공정위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규제대상 기업이 17개나 불어나는 과정을 은밀히 ‘즐겼다’. 만약 대통령이 ‘낡은 규제’라고 지적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갔을 것이다. 겉보기엔 규제대상이 대폭 줄어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총수일가 사익편취(일명 일감몰아주기) 규제는 자산 5조원 이상에 계속 적용된다. 모든 규제를 받는 재벌(28개)과, 일감 규제 및 공시의무 규제 대상인 준재벌(25개)로 이원화된 셈이다. 규제대상은 다다익선이고 제도가 복잡할수록 공무원에게 힘이 생긴다는 것을 공정위는 잘 알고 있다.

1987년 도입된 이 제도는 내년이면 30년이다. 대기업집단에 지정되면 공정거래법상 상호출자, 채무보증 등의 금지는 물론 다른 38개 법령의 ‘규제 폭탄’이 새로 가해진다. 성장을 거부하는 ‘피터팬 증후군’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국내에선 재벌 딱지를 붙여 규제하지만 이들도 글로벌 시장에선 잔챙이에 불과하다. 세계 시가총액 500대 기업에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와 한전뿐이다. 급변하는 대내외 환경 속에 수시로 사업재편을 해도 모자랄 판에 경제력 집중을 막겠다는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는 궁극적으로 폐지해야 마땅하다.

더구나 공정위의 규제본능은 어제 감사원 감사결과에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제재대상 기업에 기본과징금을 과도하게 부과하고 법 규정에도 없는 감액기준을 적용해 최대 90%까지 줄여줬다고 한다. 이러니 기업과 로펌마다 공정위 출신 전관(前官) 모시기에 혈안이다. 공정위의 본분은 경쟁 촉진이지 규제의 칼로 전관 일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