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View & Point] "사양업종은 있어도 사양기업은 없다"
조선산업 구조조정이 경제계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경남 거제와 울산 경기가 직격탄을 입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세계 1위라던 한국의 조선산업이 왜 이렇게 됐을까에 대한 분석도 이어지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500원짜리 지폐에 있는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한국 조선산업의 문을 연 지 30여년이 지난 현재 더 이상 한국 조선산업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전망도 나온다. 항공물류가 발전하고 드론의 역할이 커지면서 조선업 자체가 휘청거릴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산업의 역사를 보면 각 산업의 흥망성쇠는 당연한 일이다. 증기기관, 아날로그 가전제품, 유선전화기 등 산업을 이끌던 제품 다수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알파고 신드롬’을 겪으면서 이런 분석은 더욱 힘이 실린다. 직업 다수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은 더 이상 공상과학소설 속에서만 나오는 얘기가 아니라는 분석이다.

산업의 흥망성쇠는 기업의 흥망성쇠로 이어진다. 기업이 업종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일론 스타킹을 생산하던 듀폰이 화학회사로 변신한 사례는 경영학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 사무용 기기를 만들던 IBM이 지식서비스 기업으로 탈바꿈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사양산업으로 분류되는 업종에서 탈출하지 못한 기업의 미래는 없을까. 대표적 사양산업으로 불리는 제지업을 보자. 디지털 사회로 바뀌면서 종이 사용량이 급감하고 있다. ‘종이 없는 사무실’이란 표현이 더 이상 상상 속의 일이 아니다. 거기에다 제지업은 장치산업이다. 펄프를 가공해 종이를 만드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크고, 큰 규모의 기계장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이런 특성이 진입장벽을 높여 경쟁을 덜 치열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특성이 업종 전환의 발목을 잡고 있다. 대규모로 투자한 시설을 처분하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제지업종의 기업은 모두 공멸해야 하는 걸까. 한국에서 인쇄용지 제조를 제일 먼저 시작한 A기업의 진단은 다르다. 이 기업은 펄프를 활용해 만들 수 있는 게 종이만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에너지원으로, 바이오소재로, 플라스틱의 대체재로 펄프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게 이 회사의 설명이다.

이런 연구는 이미 시작된 지 오래다. 핀란드의 UPM 같은 기업은 더 이상 제지기업이라고 부르기 이상할 정도로 펄프를 활용해 바이오, 소재, 에너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A기업 역시 그 길로 들어서고 있다.

최근 가장 어렵다는 해양플랜트 분야에서 한 우물만 파고 있는 B기업의 분석도 비슷하다. 이 기업은 매년 30~40% 성장을 거듭했지만, 해양플랜트 업황이 침체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벼랑에 몰린 경쟁사들과 상황이 다르다. 단순히 수주해 선주가 만들어달라는 대로 만들어주던 경쟁사와 다른 전략을 썼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선주에 구조나 성능 등을 먼저 제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해양플랜트 단순 제조에 그치지 않고 운영서비스 사업도 함께하고 있다. 그 결과 장기적이면서 안정적인 수입원을 보유하게 됐다.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는 “배는 도크에 3년간 머물지만, 이후 30년은 바다 위에 떠 있다”며 “우리는 그 30년을 내다본다”고 말했다.

제지업과 조선업은 모두 사양산업으로 분류된다. 그렇다고 제지업과 조선업에 종사하는 기업 모두가 사양기업은 아니다. 평상시 어떤 준비를 했는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운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시장이 나쁘다고, 환경이 달라졌다고, 고객이 외면하고 있다고 지레 포기하면 해결책이 없다. 그럴수록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만의 원칙과 기준을 다잡아야 한다.
사양산업은 있어도 사양기업은 없다.

조미나 < IGM세계경영연구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