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철의 데스크 시각] 법인세율에 발목 잡힌 '바이오 허브'
“국내 기업 역차별요? 지금 그런 것 따질 형편입니까? (경쟁력 강화가 시급해) 역차별도 제발 빨리만 받게 해주세요.”

‘미스터 쓴소리’로 통하는 제약사 대표인 L사장의 호소다. 그는 ‘바이오 전도사’를 자처하며 공무원 앞에서도 작심비판을 서슴지 않아 이런 별명을 얻었다. L사장이 요즘 공무원을 만날 때마다 입이 마르도록 요청하는 안건이 있다. “법인세 감면 등 파격적인 유인책을 줘서라도 글로벌 제약사를 유치해 달라”는 것이다.

뜨거운 글로벌 제약사 유치전

경쟁 업체인 글로벌 제약사에 특혜를 주라니…. 그의 말에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아직 일부 목소리에 불과하지만 바이오 생태계 조성이 경쟁력의 근원이라는 관점에서는 어이없는 얘기만은 아니다. 글로벌 제약사의 생산·연구시설이 들어서면 바이오산업 저변이 획기적으로 넓어진다. 업체 간 인력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레 연구 역량과 기술도 국제 수준으로 높아진다. 황량한 사막에 샘(외자 유치)이 생기면 처음엔 잡초와 들꽃이 피다 나중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변모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글로벌 제약사 유치 경쟁이 뜨겁다.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인 데다 단기간에 국가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어서다. 각종 지원책으로 ‘아시아 바이오 허브’로 부상한 싱가포르를 각국이 벤치마킹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바이오산업을 시작한 싱가포르는 경쟁에서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노바티스 로슈 등 100여개 글로벌 제약·바이오사가 진출했다. ‘톱10’ 제약사 중 7곳이 생산시설을 가동 중이다. 싱가포르는 경제개발청에 BMS(Bio-Medical Science)라는 부서를 신설하고 15년간 367억 싱가포르달러(미화 279억달러)를 투입했다. 바이오폴리스 등 산업 인프라를 마련하고 제약사 병원 연구소 인력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싱가포르의 성공’에는 뭐니뭐니 해도 파격적인 조세 인센티브가 큰 힘을 발휘했다. 싱가포르의 법인세율은 17%에 불과하다. 첨단기술 선도기업엔 15년간 법인세를 면제해준다.

‘유럽의 변방’ 아일랜드도 파격적인 법인세율로 ‘바이오 허브’로 도약한 경우다. 아일랜드 법인세율은 12.5%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특허 소득에 대한 법인세율은 그 절반인 6.25%다.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인프라와 연구 기반이 취약하지만 화이자 등 80여개 글로벌 제약사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3개 남은 글로벌 업체도 짐을 쌀 판

L사장의 호소는 아이디어 차원에 그칠 공산이 크다.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될 야당이 법인세율 인상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여당 의원도 22%인 법인세율을 2009년 이전의 25%로 올리자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팽배한 반(反)기업 정서, 경직된 노사관계, 일관성이 떨어지는 정책 탓에 남아 있는 3개 글로벌 제약사(국내 생산·연구시설 갖춘 업체 기준)마저 짐을 싸려는 판에 법인세율마저 오르면 외국 기업 유치는 공염불에 그치고 만다. 여야 모두 4차 산업혁명을 이끌 바이오산업 육성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 행동은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법인세율을 올릴 거라면 앞으로 ‘바이오산업 육성’이라는 립서비스를 하지 말라”는 업계 비판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다.

김태철 중소기업부장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