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감동 방송광고 2016] 장인이 한땀한땀 만든 제네시스처럼, 정성스럽게 만든 한편의 명작
30년 가까이 영화를 집중적으로 보다 보니 불만과 자만심이 함께 들곤 한다. ‘평범한 영화로 나의 눈과 시간을 피로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이제 볼 만한 영화는 다 본 것이 아닐까.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그러나 1년에 5~6편의 영화가 죽비처럼 나의 어깨를 내려쳐, 계속 영화를 봐야 한다는 의무감과 기쁨을 일깨운다. 당분간 이 이상의 상상력과 스케일을 구현할 영화는 나올 수 없겠다 싶을 만큼 감탄한 인도 영화 ‘바후발리: 더 비기닝’, 2차 대전 중 유대인이 겪은 고통은 물리도록 봤다는 이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헝가리 영화 ‘사울의 아들’, 바흐의 삶을 그의 아내의 내레이션과 음악 연주, 실제 자료만으로 구성한 독일 영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가 근래 영화로 맞은 죽비라 하겠다.

마찬가지로, 아니 방영 시간이 짧기에 더욱 몰두해 봐야 하는 TV 광고에 대해서도 같은 고민과 반성을 하게 된다. 소비자와 평론가가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칭찬하는 광고를 눈여겨보면서 ‘이제 좋은 광고를 기대하기는 무리인가 보다. 다 거기서 거기네’라고 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가운데 평범한 이의 사고를 뒤집는 놀랍고 오래 기억되는 광고들이 탄생하니 말이다.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 EQ900 TV 광고-사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도 자동차 광고에 대한 기존 생각을 깨는 광고로 손꼽을 만하다. 크리에이터가 못되는 나로서는 자동차 광고 하면, 매끈하게 빠진 자동차가 구불구불 해안도로를 달리다 잘생긴 남자와 여자의 행복한 미소로 마무리되는 상투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를 뿐이다.

제네시스 EQ900 TV 광고를 처음 접했을 때는 혹시 원두커피 광고를 잘못 선택해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했다. 또 조금 지나서는 의류 광고인가 했다. 1분짜리 광고의 초반 30여초간, 자동차 광고라고 짐작할 수 있는 영상이나 내레이션이 없었기 때문이다. 30초 이후부터 자동차 부품들이 살짝살짝 편집되다 온전한 자동차를 보여주는 걸 보며 ‘아, 자동차 광고를 이렇게 시작할 수 있구나’ 했다. 처음부터 다시 보니 이 같은 영상 편집은 ‘제네시스(GENESIS)’, 즉 기원, 발생, 창세기라는 어원을 가진 제품명을 염두에 둔 담대한 도전임을 헤아릴 수 있었다. 커피색 기름진 토양을 한껏 움켜쥐는 손,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불꽃들의 춤, 그 속에 등장하는 검은 광석의 이미지. 푸른 공간에 은하수처럼 곱게 명멸하는 빛들이 오로라처럼 너울거린다. 나무껍질 혹은 패각들의 지층과 같은 이미지도 보인다. 장인의 손가락이 보이고, ‘사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자막과 함께 단단하고 두꺼운 가죽 위로 초크가 하얀 선을 긋고, 정확하게 재단하는 가위 끝, 수많은 바늘과 박음질. 마침내 두 줄의 깔끔한 박음질 선이 보인다.

금속을 무두질할 때 볼 수 있는 것일까, 연속된 고깔 모양들이 물방울 튀듯 한다. 자동차 바퀴 휠이 빠르게 돌아간다. 로고가 보이고 제작에 임하는 안경 낀 장인의 얼굴 위로 ‘사람이 머무는 곳이기에’란 자막이 겹쳐진다. 이후부턴 헤드라이트, 핸들 등 자동차의 부분들을 보여주며, 이제까지의 과정이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위해 작은 부분에도 최선을 다한 노력의 연속이었음을 웅변한다.

핸들을 잡은 손 위로 ‘위대함은 위대함의 합이다’라는 자막이 지나간다. 옅은 안개를 뚫고 날렵하게 미끄러지는 자동차. 한 대의 자동차를 위해 금속, 가죽, 공기, 물 등의 특성을 모으는 숙련된 손과 눈이 있었음을. 이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한 것임을. 그러나 당연한 일이니 크게 자랑하지 않겠다며 우측 상단에 ‘프로그레스 포 휴먼(progress for human)’이란 글자를 겸손하게 배치하고, 제품명 ‘제네시스 EQ900’을 단 한 번 소리 내어 말한다. 금속성 악기의 울림이 때론 청아한 피아노 음처럼, 타악기 연주처럼 던져지는 가운데 묵직한 효과음들이 얹히는 것도 청각을 즐겁게 한다. 가격이 만만치 않은 고급차를 남들 다 하는 광고 방식으로 보여주지 않겠다는 배포, 재료와 재료를 다루는 과정만으로 당신을 위한 최선의 작품임을 전하는 작가주의 감독, 현대 미디어 아티스트의 결기가 느껴진다. SF 영화의 도입부 같기도 한 이 광고를 공명이 큰 너른 현대미술관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홀로 감상하고 싶다.

옥선희 < 영화·방송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