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특정 산업 구조조정을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태도에서 한발짝 물러서면서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 국책은행에 자금을 지원할지 묘안 찾기에 들어간 모습이다. 지난 주말 이주열 총재가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대한 직접출자보다는 대출을 통해 자본력을 확충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도 그런 고심의 흔적이다.

산업 구조조정을 위해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찬반이 팽팽하다. 사안이 시급한 만큼 한은이 나서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하지만 보편적이고 무차별적으로 행사해야 할 발권력을 특정 산업 지원에 쓰는 것은 그 자체로는 합리화할 수 없다. 담보 대출을 통한 지원안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일종의 고육책일 것이다. 물론 중앙은행도 예외적으로 불가피하게 발권력을 동원해야 할 때가 있다. 문제는 원칙과 기준이다. 이번에 정부나 한은 모두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도 확립된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한은이 수출입은행에 직접 출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산업은행 출자가 불가능한 것만 해도 그렇다. 출자 주체인 한은법에는 관련 규정이 없고 출자를 받는 국책은행법에서 제멋대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법률 간 정합성에 맞지 않는다. 자칫 권한과 책임이 유리되는 행정편의주의적인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국가의 상당한 자원이 투입돼야 하는 문제인 만큼 결국은 국회를 거쳐 해결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어떻게든 골치 아픈 국회를 피하기 위해 재정을 통한 직접 지원보다는 그 책임을 한은에 떠넘기려는 모양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회에서 실타래를 푸는 게 옳다. 한은법 산업은행법 등 관련 법령 개정은 물론 그 과정에서 국가 자원 투입의 우선순위도 질서정연하게 정리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국회에서 추경도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국회에 그것을 기대할 수 없다면 그런 국회는 둬서 무엇하나.

갈등과 알력을 조정해가면서 국가의사결정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정치다. 정부는 그것이 번거롭다고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이번 문제와 관련해 아직은 말을 아끼고 있는 여야 정치권도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국회까지 책임을 피하려 든다면 누가 이 골치 아픈 문제를 매듭짓겠는가. 구조조정 자금은 정부가 국회 동의를 얻어 예산으로 집행하고 한은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융시장 불안이나 자금 경색에 대처하는 것이 국가 기관들 간의 정상적인 분업이요 협업이다. 바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꿸 수는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