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권력 동원에 '신중론'

"한은, 국책은행에 출자보다 대출이 적절"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4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담보 없는 지원은 ‘손실 최소화’라는 중앙은행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4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담보 없는 지원은 ‘손실 최소화’라는 중앙은행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발권력을 동원한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신중론을 제기했다. 담보 없는 지원은 ‘손실 최소화’라는 중앙은행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이 총재는 4일(현지시간) 제19차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가 열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구조조정에 발권력을 이용하려면 납득할 만한 타당성이 필요하고 중앙은행이 투입한 돈의 손실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앙은행이 손해를 보면서 국가 자원을 배분할 권한은 없다”며 “한은법상 확실한 담보가 있어야 발권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대안으로는 한은이 담보를 바탕으로 은행에 직접 대출하는 은행자본확충펀드를 제시했다.

정부에선 한국은행이 수출입은행,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에 출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특정 은행 및 구조조정 기업을 지원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출자한 뒤 지원금 회수가 불투명한 데다 국책은행 손실이 중앙은행 손실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런 논란에 대해 이주열 한은 총재는 “손실 최소화 원칙에서 보면 아무래도 출자보다 대출이 부합한다”고 말했다. 대출은 담보 설정 등이 가능해 중앙은행의 손실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2009년 운영한 자본확충펀드를 예로 들었다. 당시 한은은 채권을 담보로 잡은 뒤 시중은행에 대출을 했고, 은행들은 그 자금으로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낮은 은행을 지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중앙은행(Fed)이 민간회사인 AIG와 제너럴일렉트릭(GE)을 지원할 때도 지원금 회수가 가능한 대출을 주로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Fed는 AIG에 1125억달러를 대출할 때 AIG와 자회사의 모든 자산에 담보권을 설정했다. 선진국 중앙은행 사례를 발권력 동원의 근거로 드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미다. 이 총재는 “만약 Fed가 기업 지원으로 큰 손실을 봤다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1951년 미국 재무부와 Fed는 ‘중앙은행이 특정 분야에 대한 신용공급이나 이들로부터의 신용위험 인수를 회피해야 한다’고 합의했고 금융위기 때도 이 같은 원칙이 지켜졌다는 설명이다.

이 총재는 발권력 동원의 타당성에 대해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에 중앙은행이 들어가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불가피성이 있어야 한다”며 “어느 나라를 봐도 구조조정은 정부의 주된 역할”이라고 했다.

한은이 타당성과 손실 최소화를 강조한 만큼 향후 정부와의 협의가 진통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이에 대해 이 총재는 “출자 방식을 100% 배제하는 것은 아니고 타당성이 있으면 그것도 가능하다”고 여지를 남겼다. 발권력 동원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면 한은도 검토할 수 있다는 의미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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