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의 데스크 시각] 산으로 가는 양적완화 논쟁
작명 때문에 정책이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리병원’이 그런 케이스다. 이명박 정부 시절 서비스산업선진화 명분을 내걸고 추진된 ‘영리병원’ 정책은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병원을 영리사업으로 내몬다는 단순한 반대논리에 부딪혀 중도 하차했다. 정부도 ‘아차’ 실수를 깨닫고 뒤늦게 ‘투자개방형 병원’으로 명패를 바꿔 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당시 총대를 멨던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영리병원을 반대한 ‘전재희(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뜻을 접어야 했다.

영리병원 데자뷔 ‘양적 완화’

한국형 양적 완화 논쟁은 영리병원의 데자뷔다. 처음 이 얘기를 꺼낸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의 속내는 딴 데 있었다.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해결에 통화당국(한국은행)도 역할을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양적 완화보다는 정책금융에 더 가깝다. 이걸 있는 그대로 표현하자니 선거 공약으로 주목받기 어려울 것 같아 만든 이름이 ‘한국형 양적 완화’였다. ‘꾀돌이’ 별명을 가진 강봉균다운 발상이었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요란스럽게 포장해 대중의 이목을 끌어내려는 기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노이즈 마케팅이 너무 주효했기 때문일까. 세간의 이목은 온통 한국형 양적 완화라는 포장에만 쏠렸다. 같이 공약을 만든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표현대로라면 “강 전 장관의 손가락은 달(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해결)을 가리켰는데, 모두가 달은 쳐다보지 않고 손가락(한국형 양적 완화)만 보더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논쟁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강 전 장관의 본래 의도대로라면 당장 필요한 논의는 ①해운 조선 구조조정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재원이 필요한지 ②그걸 충당하는 데 재정만으로 부족하다면 통화당국도 역할을 해야 하는지 ③그래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게 최선인지와 같은 구체적인 ‘툴(tool)’로 모아져야 하는데, 여전히 ‘한국형 양적 완화가 맞냐 틀리냐’며 실체 없는 논쟁만 벌어지고 있다. 미시적 처방이 필요한 상황에서 거시적 담론만 늘어놓는 꼴이다.

양적 완화 논쟁 뒤에 숨는 한은

더 큰 문제는 한국형 양적 완화가 ‘특별한 통화정책’으로 포장되면서 한은이 그 뒤에 숨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한은이 구조조정 지원사격에 동참하는 것은 새로운 일도 아니다. 과거 외환위기와 2004년 카드사태 때도 정부의 구조조정을 돕기 위해 부실채권정리기금 채권과 예보채를 사들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엔 정부와 청와대의 압박에도 야당이 반발하자 한은은 실체 없는 찬반 논쟁에 편승해 “국민적 합의가 우선”이라며 어떤 대안도 내놓으려 하지 않고 있다. 내부에선 “(상명하달식) 논의 절차가 잘못됐다”며 중앙은행 독립성 문제로까지 연결지을 태세다. 구조조정 재원 마련 논의가 한은 독립성 문제로 비화되면 결과는 뻔하다. ‘골리앗(청와대와 정부)’과의 싸움에서 한은은 언제나 약자인 ‘다윗’으로 행세하며 여론과 야당을 등에 업고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냈다.

한국형 양적 완화는 영리병원처럼 반대에 부딪혀 중도 폐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모두가 손가락에 집착한 나머지 정작 가리키려던 달을 보지도 못하고 날이 샐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모호하고 실체가 없는 한국형 양적 완화란 용어는 버리는 게 좋겠다.

정종태 경제부장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