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미국에서 듣는 한국 위기론
며칠 전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전문가들로부터 한국과 세계 경제 상황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한국 중소기업 수출지원단체의 한 인사는 “미국이 달라졌다”고 했다. 예전에는 한국 중소기업들의 수출상담회 개최를 미국 주(州)정부에 문의하면 협조가 잘됐지만 요즘은 상황이 변했다는 것이다. “일방적인 수출상담회는 안 된다. 미국에 투자를 약속하거나, 미국 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할 수 있게 다리를 놔줘야 한다”는 조건을 붙인다고 했다.

미국 주정부 관계자들은 직접 수출사절단을 이끌고 한국을 찾기도 한다. 4월 말 메릴랜드 주정부, 5월 델라웨어 주정부, 6월엔 미 상무부가 각각 20명 안팎의 수출사절단을 이끌고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커지는 통상·금융 리스크

‘소비대국’ 미국이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은 교역국들과 환율정책 등을 놓고 전에 없는 강공 모드를 취할 것임을 예고한다.

워싱턴DC의 한 금융계 인사는 내년엔 국제통화기금(IMF)이 다시 바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자재 가격 하락 등으로 경제 파탄에 직면해 이미 IMF에 도움을 요청했어야 하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겨우 버텨온 국가들이 내년쯤이면 IMF에 손을 벌릴 가능성이 크고, 그때쯤이면 국제 금융시장이 또 한 차례 격랑 속에 휘말릴 것”이라고 관측했다.

안팎의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안하면 한국은 ‘외딴 섬’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4·13 총선 직후 워싱턴DC를 찾은 한 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조차 한국 내 정치 상황을 걱정했을 정도다. 그는 “국회에서 과반을 차지한 야당들이 대여(對與) 투쟁 과정에서 선명성 경쟁을 벌일 것이고, 여당은 여당대로 친박(親朴)계와 비박(非朴)계로 쪼개져 여야가 ‘4당 체제’로 대통령 선거를 치를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내년까지 한국 내 정치적 대혼란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위기론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대내외 위험 요인이 부각될 때마다 어김없이 위기론이 등장했다. 2~3년 전엔 한국 경제 위기론을 담은 《2030 대담한 미래2》(최윤식 저), 《글로벌 경제 매트릭스》(임형록 저)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리더십 부재’가 가장 위험

한국 정부는 그럴 때마다 ‘인지된 리스크는 리스크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수차례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학습 능력을 키웠고, 무엇보다 위기에 선제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작은 고비는 있겠지만 큰 위기는 없을 것으로 낙관했다. 한 현직 경제관료는 “위기 가능성을 걱정해 주는 것은 좋지만 위기를 부추기는 보도는 삼가야 한다”고 경계했다.

그러나 리스크가 인지됐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스크가 리더십의 부재(不在)라는 변수를 만나면 위기로 이어진다”는 지적이 예사롭지 않다. 워싱턴DC 인근에 사는 한 원로 정치인은 “리스크를 예상하고 감지했더라도 제때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면 위기로 번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한국 국회 내 여소야대(與小野大) 역학구도는 대통령 선거 정국과 맞물린다. 워싱턴DC 싱크탱크의 한 한국 전문가는 “위기가 닥치면 누가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한마디 거들었다. 한국은 암초가 가득한 바다를 여러 사공들이 서로 다투며 항해하는 돛단배 모습으로 미국에 비치고 있다.

박수진 워싱턴 특파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