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대~16대 : 국세청, IMF와의 한판 승부(1998년~2007년)



DJP 연합정부의 첫 국세청 수장 자리에 앉은 11대 이건춘 청장은 IMF 외환위기로 만신창이가 된 경제상황에서 세수를 확보해야 하는 중책을 떠안았다. 이 청장은 이에 과세 사각지대에 대한 엄중한 과세와 한국은행을 포함한 40개 공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로 국가재정을 뒷받침했다.




◆…1999년 2월 국세청은 카사네그라 단장을 대표로 한 IMF세정지원단을 접견했다.


아울러 이 청장은 우편으로 세금을 신고하는 제도를 도입해 납세자의 편의성을 높였다. 납세자 우대를 위해 조세의 날을 납세자의 날로 변경 한 것도 이 청장이 남긴 유산 중 하나다.


이 청장이 1년을 조금 넘긴 후 물러난 자리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안정남 12대 청장이 앉았다.


첫 호남 출신 국세청장이었던 안 청장은 획기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경북출신 국장을 광주지방국세청장으로, 호남출신 국장을 부산지방국세청장으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묘수를 보여주기도 한 안 청장은 취임과 동시에 '국세청 제2개청'을 선언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135개였던 세무서를 통폐합, 99개로 만든 것이 안 청장의 작품이다. 국세청의 고질적 비리원천이었던 지역담당제를 완전히 폐지해 버린 것도 마찬가지.


2001년에는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대대적인 언론사 세무조사를 실시, 다수의 언론사들이 거액의 세금을 추징당하고 일부 언론사는 사주가 고발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안 청장은 언론과 불편한 관계가 형성됐고, 건교부 장관으로 영전했지만 축재 의혹 등 크고작은 문제가 불거지면서 20일만에 물러나는 '참화'를 겪었다. 야인이 된 이후에도 언론의 집요한 추적에 시달리는 생을 살아야 했다.


13대 청장인 손영래 청장은 부동산 투기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투기의 원천지인 중개업소에 조사력을 집중하는 순발력을 보였으며, 홈택스 시스템을 본격 가동해 선진세정의 기틀을 구축했다.




◆…2006년 5월 열린 홈택스 이동체험 행사.


첫 여성세무서장(제연희)을 배출시키기도 했던 손 청장도 '끝'이 좋지 않았다. 퇴직 후 썬앤문 감세로비 의혹에 연루되면서 영어의 몸이 되는 고초를 겪었다.


참여정부 첫 국세청장으로 인선된 이용섭 14대 청장은 외부인(기획재정부) 출신 청장이었다. 그의 국세청장 등극은 국세청 내부의 실력자들이 청장 자리를 놓고 '암투'를 벌이면서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인 측면이 컸다는 것이 정설이다.


국세청 조직에 일종의 '충격파'를 주기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이용섭 청장은 참여정부의 모토였던 '혁신'을 유독 강조한 인물.


특히 인사혁신과 성과관리 혁신을 강조했다.


조직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이고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인사라는 것이 그의 철학. 아울러 그는 권력기관으로 인식되는 국세청을 봉사기관으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 같은 노력으로 국세청은 당시 정부업무평가 최우수기관과 혁신 선도부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용섭 청장은 성공적인 2년의 국세청장 재임기간을 마친후 승승장구, 청와대 혁신기획관과 행정자치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내며 참여정부 최고의 '스타관료'로 각광받았다.


이용섭 청장의 뒤를 이은 인물은 '내부인' 출신 이주성 15대 청장이었다. 이주성 청장은 글로벌 시대에 맞게 세계속에서 국세청의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취임 후 론스타 등 외국계 펀드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 외국계 펀드의 탈세를 방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을 받았다.


재임 1년3개월을 조금 넘긴 시점, 밑도 끝도 없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신변을 둘러싼 이런 저런 논란을 야기했다. 결국 수 십억원 대의 아파트를 뇌물로 제공받은 혐의가 잡히면서 구속되는 신세가 됐다.


이주성 청장의 뒤를 이은 전군표 16대 청장은 당시 도입된 종합부동산세제를 성공적으로 시행하는 한편 근로장려세제(EITC) 실행과 관련 국세청에 대규모 인력을 충원하는 등 나름의 업적을 쌓았다.


'따뜻한 세정'이라는 낯설지만 신선한 캐치프레이즈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부하 직원에게 인사청탁 명목으로 수 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현직 국세청장으로서는 처음으로 구속되는 초유의 비극을 만드는 주역이 됐다.


□ 17대~21대 : 국민신뢰가 우선이다(2008년~2016년)



전군표 청장의 구속기소로 흔들리던 국세청을 바로잡는 숙제는 한상률 17대 청장에게 넘어왔다. 한상률 청장은 역외탈세 방지에 중점을 두고 국세행정을 추진했다. 특히 역외탈세를 방지하기 위해선 해외 유명 로펌들과의 다툼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조사역량 강화에 힘을 쏟았다.


'봉사'하는 국세청을 만들기 위해 봉사단을 조직하는 등 국세행정 외적인 부분에도 신경을 많이 쓴 그 또한 불명예스럽게 국세청장에서 물러나면서 '외부인' 출신 청장이 또 오게 만든,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한상률 청장이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후 6개월 동안 국세청은 차장 대행(허병익 전 국세청 차장) 체제로 가동되다가 백용호 18대 청장을 맞았다. 장관급인 공정거래위원장으로 근무하던 그가 차관급인 국세청장으로 임명된 것은 당시 국세청 안팎에 큰 충격을 줬다.


백 청장은 세무조사의 투명화를 견지해 나가며 청탁이나 개인감정 없는 인사를 실시하려 노력했다. 또 외부인사인만큼 국세청 직원들과 소통하려 했고 국민의 신뢰를 얻는 국세청을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백 청장은 국세청장이 되면서 가질 수 있었던 권력욕을 최대한 자제, '나는 언젠가 떠날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기회있을 때마다 조직원들에게 인식시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의 집무실 책상에는 개인 물품을 하나도 가져다 놓지 않았을 정도였다.




◆…2010년 국세청 126 세미래(稅美來) 콜센터 개통식.


정권의 실세였던 백용호 청장의 재임기간은 딱 1년이었다. 그는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영전하면서 빈 자리를 내부인 출신 이현동 19대 청장에게 물려줬다. 이현동 청장은 2년 넘게 청장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특히 역외탈세 근절을 본격적으로 선언하며 이와 관련한 인프라 구축에 힘썼다. 또한 납세자와의 사전 세무마찰을 줄이기 위해 사전안내를 전격 폐지하고 사후검증의 강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업무체계를 완전히 바꿨다. 현재 정착된 차세대국세행정시스템 구축을 위한 기반을 닦은 것도 이현동 청장이었다.


이현동 청장은 전임 내부인 출신 국세청장들과 달리 '안전하게' 재임기간을 마쳤고,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후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놓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박근혜 정부 첫 국세청장인 김덕중 20대 청장은 정부의 국정 과제이기도 한 '지하경제 양성화'에 중점을 두고 국세행정을 운영했다. 지하경제양성화를 위해 TF팀을 신설하고 FIU 자료를 들여다 볼수 있는 일명 'FIU법'을 통과시키는데도 기여했다.


아울러 김덕중 청장은 세무조사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세무조사감찰TF를 설치, 부조리 차단에도 힘썼다.


21대 임환수 현 국세청장은 신고패러다임을 사후관리에서 사전관리로 전환하고 성실신고 지원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지방청 성실납세지원국과 세무서 개인납세과를 신설했다.


차세대국세행정시스템을 개통해 새로운 신고 서비스를 확충했으며, 2015년 국세청 개청 이래 최초로 세수 200조원 시대를 열었다. 특히 국세청 인사문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는 등 새로운 패러다임을 작성해 나가고 있는 상태다.


조세일보 / 이현재 기자 rozzhj@jose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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