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업에 특정 지배구조 강요 말아야
과거 공정거래위원회의 처분 때문에 라면업계가 지금 타격을 입게 생겼다. 그것도 미국에서다. 2012년 공정위는 한국의 4대 라면생산업체가 라면가격을 담합했다는 이유로 과징금 1354억원을 부과했는데, 작년 말 대법원이 “가격 인상에 관해 별도 합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과징금 부과를 취소했다.

대법원 판결은 수긍이 간다. 판사는 증거에 따라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증거 없이는 유죄로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담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련 원료시장의 움직임만 봐도 가격인상이나 신제품 출시를 금방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한국 시장은 좁다. 이런 좁은 시장에선 위험한 담합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미국에서는 소비자들의 집단소송으로 번졌다. 이 사건에선 한 업체가 150만달러를 제시하고 원고 측과 잠정 합의했다. 나머지 업체들도 버티기 어렵게 됐다.

한국거래소와 기업지배구조원은 지난 18일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을 개정하기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 개정안에 제시된 내용을 보자. 출처불명의 ‘주주의 책임’이 들어가고, 이사의 정원을 늘리며, 모든 상장회사는 이사 총수의 반을 사외이사로 임명하도록 하고, 집행임원제 도입, 집중투표제 채택, 심지어는 지배구조문제가 아닌 근로자 권익 보호, 하도급거래 등의 내용까지 추가하려고 한다. 공시부담도 엄청나게 늘어난다.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가 세계적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은 누누이 지적돼왔다.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주로 공정위, 국세청, 검찰 등에서 근무하던 고위 인사를 임명하는 대기업 사외이사는 경영에 전문성이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사외이사는 토론도 없이 기계적으로 찬성 쪽에 손드는 완전 ‘자동거수기’이거나 ‘고무도장’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구글, 애플, 엑슨모빌 등은 전직 동종 기업 임원, 심지어는 경쟁업계의 최고경영자(CEO) 등 전문성이 강한 사람을 이사로 임명한다. 여성임원이 20% 가까이를 차지하고, 인종의 다양성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는 한국적 기업환경과는 맞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언제 공정거래법 위반 조사, 세무조사, 임원에 대한 배임죄 수사에 걸려들지 알 수 없다. 이런 일은 기업에 상상 이상의 타격을 준다. 한국기업 고유의 리스크다. 이를 대비하려면 이 분야의 전문가를 쓸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라면업계의 담합혐의사건을 보라. 문제가 터졌을 때 임원 중에 공정거래에 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사회에서 무슨 논의를 할 수 있겠는가.

난데없는 ‘주주 책임’만 하더라도 회사법상 ‘주주의 엄격한 유한책임원칙’과 모순된다. 이사의 정원도 미국 S&P500 기업의 경우 보통 9~12명으로 한국 대기업과 비슷하다. 집행임원제도 한국의 기업정서와 실정에 맞지 않는다. 집중투표제도는 원산지인 미국에서도 시들해진 지 오래다.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은 업계의 자율규범인데, 이런 내용이 과연 업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한 번 만들어지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나쁜 기업으로 낙인찍히면 회복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은 국회의 ‘동네북’이 된 지 오래다. 이젠 민간기구까지 나서서 장단을 맞춘다고 한다.

지배구조에 정답은 없다. 각 기업 스스로 가장 알맞은 구조를 선택하게 하면 된다. 어떤 구조가 알맞은지는 정부나 민간기구가 아니라 각 기업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영업전문 인력도 모자라는 판이다. 기업이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기술혁신과 일자리 창출에 매진할 수 있도록 간섭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최준선 <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jsskku@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