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자의 슬픔
이번만큼은 투표를 거부할 것이라고 결심한 터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배달된 선거공보를 뒤적거리게 된다. 울긋불긋하고 조잡한 종이들이 유흥가 전단지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천국을 만들어 주겠노라’는 허무 개그들이다. 지난 5년간 납부한 세금이 ‘3만원’이라는 후보도 있다. 후보 네 명 중 두 명이 전과자다. 불쾌한 기분이 치밀어 오른다. 불법 집회와 소음의, 소위 민주화 전과도 짜증스럽다. 그러고 보니 새누리당의 친박 좌장 서청원은 정치자금법,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종인은 뇌물 전과자다. 고가의 시계보다 금덩어리에 눈길이 더 간다. 모두 사면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더 화가 치밀 것이다.

최근의 미국 정치는 적지 않은 위안이 된다. 평등한 개인들이, 잘 정돈된 타운 홀에서, 공화주의적 조화를 추구한다던 토크빌의 미국 민주주의도 옛날이야기다. 공갈꾼 트럼프와 몽상가 샌더스가 버젓이 인기를 다툰다. 숙고할 능력이 있고, 이해관계가 동질적이며, 자기책임이 지배하는 그런 민주주의는 있어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둘러보면 제대로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나라를 찾기도 어렵다. 가장 최근의 사례인 아랍의 봄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라 종족 분쟁과 IS 칼춤에 자리를 넘기고 말았다.

선거는 선진국에서조차 패밀리 비즈니스로 전락한 지 오래다. 케네디, 부시, 클린턴 가문도 그렇지만 일본 각료의 50%, 의원 3분의 1이 세습이다. 하토야마, 고이즈미, 아베가 모두 3대 세습이다. 투표는 연예인을 뽑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단지 익숙한 얼굴을 뽑는 미인 대회다. 한국도 그렇게 변해간다. 한국은 한때 아시아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시민혁명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 운동권이라는 말은 낡은 것의 상징이요, 음모와 억지와 무식의 대명사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들은 보여준 것이 없다.

새누리도 희망을 안겨준 적이 없다. 대통령은 국회개혁을 호소하고 있지만 친박이 득세하는 것이 싫어서 국회개혁도 포기한다는 보수층이 넘치고 있다. 분명 간신들도 넘치고 있다. 한국노총 출신 후보자가 넘치는 것이 대통령 지시라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더민주당이 그나마 투표가 가능한 정당으로 변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노회한 책략의 성공이다. 그러나 운동권의 위장폐업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정치는 국가적 의사결정이 아니라 국가적 무능력을 극대화하는 절차다. 조선의 패망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선거는 국가를 경영할 능력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복지 뇌물을 경쟁하는 절차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한국 정치는 꿈조차 꾸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국회 입법이라는 절차를 거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자유를 침해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인간에 내재한 본능일 수도 있다. 입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만 하면 “우리 모두를 위해 저놈의 돈을 빼앗자”는 주장에도 사람들은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그것을 합의된 정의요 도덕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우리가 작은 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 국가의 원초적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줄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누가 권력자가 돼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그런 ‘작은 정부’가 전제돼야 한다. 부디 투표장에 가서 누가 덜 나쁜 후보인지를 억지로 가려 바보라도 찍어야 하는 그런 부조리 상황극을 누가 좀 막아다오.

입법권력은 너무도 크다. 그들은 거들먹거리기까지 한다. 심지어 5분의 3결인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어내 마지막 한 명의 국회의원에게 모든 자비를 구걸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지역주의도 다시 돌아왔다. 대구는 자기들만의 차기 권력자를 탐색하느라 정신이 없고, 광주도 지역의 단결에 비로소 안도하는 분위기다. 유권자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누구도 찍을 수 없다. 그러나 최악은 피해야 한다. 차악의 선택을 강요받는 자의 비극은 이런 것이다. 선거공보를 다시 들여다보니 누군가가 ‘시장경제원칙 준수’라고 조그맣게 써놓았다. 이 말 한마디를 핑계 삼아 기어이 투표소에 나가기로 한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