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포스트 단색화' 넘어 '한국 현대미술의 다색화' 발굴할 때
지난 4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의 1970년 뉴욕시리즈 ‘무제’ 점화가 48억6750만원(수수료 포함 57억4300만원)에 팔려 국내 미술품 낙찰가 최고가를 경신했다. 이는 지난해 10월 같은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역시 김환기의 1971년 전면점화 ‘19-Ⅶ-71 #209’가 세운 47억2000만원을 불과 6개월 만에 추월한 것이다. 이로써 김환기 전성시대의 서막을 올린 셈이 됐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난번 200호(253×202㎝) 시작가 30억원에 비해 이번엔 150호(222×170.5㎝) 시작가 35억원으로 크기 대비 시작가와 낙찰가가 모두 높았다는 점이다. 국내외 응찰자의 경합 끝에 한국인이 아니라 아시안 컬렉터에게 낙찰됐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국내 내수시장에서 세워진 박수근의 ‘빨래터’(45억2000만원) 기록과는 분명 차별화된 의미로 보인다.

때마침 최근 한국 현대미술이 ‘단색화’ 중심으로 국제무대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김환기의 여러 시기별 작품 중 유독 뉴욕거주 시절 전면점화 비구상시리즈가 각광받는 이유 역시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지난 3월 열린 아트바젤홍콩 기간에도 한국 단색화 작가들에 대한 러브콜은 대단했다. 한국 단색화 계열의 작가들을 전면에 내세운 외국 유명 화랑도 적지 않았다.
[뉴스의 맥] '포스트 단색화' 넘어 '한국 현대미술의 다색화' 발굴할 때
우선 박서보는 세계적 갤러리인 샤르트(홍콩·베이징), 페로탱(파리·홍콩), 블룸앤포(LA·뉴욕·도쿄) 등에 동시에 출품돼 가장 주목받은 사례다. 이우환도 SCAI(도쿄), 페이스(뉴욕·홍콩·베이징), 도쿄갤러리+BTAP(도쿄) 등을 통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어 하종현과 권영우는 블룸앤포, 정창섭은 페로탱, 전광영 역시 펄램 등에 이름을 올렸다. 이외에 단색화와 무관하게 국제무대에서 활약해온 이불과 서도호도 리먼머핀(뉴욕·홍콩)에 출품했다.

단색화 열풍이 한국 미술시장을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 가장 핫 이슈 작가로 꼽히는 김환기, 박서보, 정상화 세 명만을 비교해도 한눈에 확인된다. 구상과 비구상 작품이 고른 평가를 받는 김환기의 작품가격 변화주기는 국내 미술시장 주기를 그대로 대변한다. 반면 박서보 작품가는 지난해 11월 크리스티홍콩에서 11억6350만원을 기록해 10년 만에 경매가 기준 40배 이상 급등했다.

경제력 따라가는 미술시장 지형도

정상화는 2014년 이후 단색화 열풍의 산증인이다. 2005년 150만원에 불과한 연간 경매 낙찰총액이 2015년엔 45억원을 훌쩍 넘기면서 무려 3000배 이상 상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단순히 시장의 트렌드가 변했다거나, 일부 투기 세력이 관여했다는 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한 대목이다. 이젠 국내 미술시장의 구조나 체질이 어느 정도 개선됐고, 국제 시장에도 상당히 개방된 상태기 때문이다.

보통 국제 미술시장의 지형도는 세계 경제권을 주도하는 국가들의 패권경쟁 구도와 닮아 있다. 미술시장의 활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엔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으며, 유럽연합(EU) 태동 이후엔 유럽이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일 즈음 중국이 세계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함과 동시에 홍콩을 중심으로 중화권 미술시장의 권세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안정된 유통시스템 정착돼야

국내 내수시장도 경제적 시대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기복의 과도기를 지나왔다. 제대로 된 미술시장 규모가 갖춰진 것은 2005년을 전후한 시기다. 1970년대에 1만4000원 정도였던 미술가의 월평균 소득은 2000년대 들어서야 약 140만원으로 증가했다. 특히 21세기를 맞아 ‘문화의 세기’라든가, 문화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등의 사회적 인식이 생겨나면서 미술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러다 2007년 전후해 ‘한국 미술시장의 르네상스기’라는 행복한 홍역을 호되게 치른다. 그 이전 상황과 간단히 비교하면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국내에 현대적 개념의 화랑이 생겨난 것은 1970년대 초반 경제개발붐의 시기와 맞닿아 있다. 미술시장 역시 후반에 접어든 1978년 이후 부동산 경기회복세를 시작으로 1980년대 아파트 중심 생활패턴의 전환기, 1984년 건축물 장식품을 통한 미술시장 부양책인 ‘1%법’ 등으로 한동안 안정세를 유지한다.

하지만 국내 미술시장은 1993년 금융실명제, 19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달성, 1995년 광주비엔날레,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1997년 외환위기, 1999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탈피 등 가히 ‘롤러코스터 기상’으로 만신창이가 된다. 그나마 2002년 월드컵 개최와 정보기술(IT)산업의 약진, 벤처사업 부흥 등으로 어느 정도 호재를 맞는다. 이어 갑작스런 외부 자본 유입으로 때아닌 ‘투기광풍’의 큰 혼란을 경험한 2006~2007년은 우리에게 적잖은 과제를 남겼다.

미술시장의 안정된 기반과 발전은 내부적으로 성숙한 인식과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 없이는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2005년 중반 이후에 시작해 2008년 중반까지 유지된 미술시장의 호황은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쇼크의 직격탄으로 신기루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미술시장에 아무리 많은 자본이 유입된다고 해도 유통문화 전반에 굳건한 신뢰감과 안정된 시스템이 없을 경우 언제든지 썰물처럼 허망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

문화정체성 담보할 수 있어야

우리 미술시장의 기운을 회복하도록 불씨 역할을 해준 단색화 열풍의 시작점은 2013년 말엽이다. 이는 공교롭게도 미국 경제가 회복 국면에 접어든다고 전망된 시기와 맞물린다. 단색화의 긍정적인 평가 역시 국내보다 서구권 중심의 해외 미술시장에서 먼저 시작됐다. 작년 이후 너무나 거세진 그 열풍이 마치 2007년 미술시장 현상과 비슷하다는 우려의 시선도 있다. 반면 세계에서 주목하기 시작한 한국 현대미술이 경쟁력과 투자가치를 갖게 됐다고 반기는 측면도 적지 않다.

속담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빨리 서두를수록 도리어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교훈이다. 지금의 단색화 열풍이 그렇다. 한창 고점에 다다른 이 시점에 또 다른 단색화 후발주자 찾기에만 혈안이다. 2007년을 바른 교훈으로 삼으려면 ‘돈 될 만한 상품’을 찾는 것에 주력할 것이 아니라 진정 ‘한국 현대미술의 경쟁력’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 늦기 전에 ‘포스트 단색화’를 넘어 한국적 문화정체성의 다양성과 경쟁력을 담보할 ‘한국 현대미술의 다색화’ 발굴에 나서야 한다.

김윤섭 <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숙명여대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