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누구나 한 번 쯤 진정한 ‘나’에 대해 탐구해본 적 있을 것이다. 이런 접근은 어떨까.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 미친 영향의 집합체라는. 부모님이 만든 나, 선생님이 만든 나, 친구들이 만든 나, 연인이 만든 나, 혹은 음악이 만든 나. 루싸이트 토끼의 새 음반은 이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루싸이트 토끼
루싸이트 토끼
ABOUT 루싸이트 토끼. 영태(본명 김선영)와 에롱(본명 조예진)으로 구성된 2인조 여성 듀오. 2007년 1집 ‘트윙클 트윙클(Twinkle Twinkle)’로 데뷔했으며 ‘봄봄봄’, ‘꿈에선 놀아줘’ 등이 대표곡이다. 초창기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어쿠스틱 팝으로 사랑받았으나, 최근 전자음악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새로운 음악을 보여주고 있다.

ABOUT L+ 3집 ‘그로우 투 글로우(Grow to glow)’이후 3년 만에 발매되는 정규음반. ‘L+’는 ‘나’와 ‘너’를 겹쳐 놓은 모양으로, ‘타인과 연결된 존재로서의 나’를 조명한다. 타이틀곡 ‘에브리유(Every you)’를 비롯해 ‘콩벌레’, ‘내가 네가’ 등 총 9개 트랙이 수록돼 있다.

10. 정규 4집 ‘L+’는 음악적인 변화가 돋보이는 음반입니다. 초창기의 어쿠스틱 팝, 흔히 ‘소녀스럽다’고 말하던 음악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선영 : 1집을 냈을 때가 스물한 살, 스물두 살 때였어요. 소녀 이미지가 굳어질 거라는 생각 없이, 그냥 그 때의 감성을 담아서 만든 거죠. 나이가 들면서 계속 바뀌어가는, 일기장 같은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게다가 루싸이트 토끼가 기획된 팀은 아니니까요. 우린 하고 싶은 음악을 계속 할 뿐이거든요. 오히려 비슷한 음악을 계속 써내는 게 더 힘들 것 같아요.

10. 음반 소개 글이 조금 어려웠어요. “나의 빈 곳을 채우는가 하면, 혼란과 절망으로 아픈 구석이 되기도 하는 존재는 너일 수도, 우리를 둘러싼 그 무엇도 될 수도 있다”는데, 결국 ‘너’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면 될까요?
예진 : 아니요. 타인에게서 영향을 받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요. 누구든 홀로 존재할 수는 없잖아요. 부모님을 비롯해 가족, 친구들, 선생님 등 살아가는 과정에 만나는 사람도 많고, 그들로부터 영향도 받고 상처도 받고 사랑도 받죠. ‘나는 나다’라고 자부하지만 그게 온전한 ‘나’가 아니라 ‘타인과 연결된 존재’라는 걸 의식한 상태에서 만들게 된 음반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어떻게 자유롭게 할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면서 만들었습니다.

10. 어쩌다 이렇게 심오한 주제를 떠올리게 됐나요?
예진 : 일단 팀 멤버가 두 명이잖아요. 둘이서 계속 음악을 만들며 함께 해왔던 것도 영향을 줬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한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어떻게 이 이상으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계속 생각하다보니까, 근본적으로 이런 물음에 부딪히게 되더라고요.
선영 : 사회가 하나로 뭉뚱그려져서 개인에게 큰 파워를 미치는 게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특히 한국 사회에는 유독 찐득찐득한 관계가 있잖아요. 그 안에서 내가 잘 살아가려면 사회의 속성을 잘 소화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이 주제를 떠올렸어요. 그리고 저희는 서로에게 가장 큰 타인이거든요. 둘이서 싸우기도 하고 함께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가장 큰 화두가 됐어요.

10. 서로를 자유롭게 한다는 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건가요?
예진 : 어떻게 해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겠죠. 다만 내가 나를 받아들이는 게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것과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나를 속박하면 남도 속박하게 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10. 나를 속박한다는 건 어떤 상태인가요?
선영 : 상대를 판단하는 잣대가 있잖아요. 그 잣대가 어느 순간 나를 향하게 되더라고요. 스스로 괴로워지는 걸 느꼈어요. 나 스스로를 더 용납하면 타인에게도 색안경 없이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서로를 좀 더 자유롭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루싸이트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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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록곡 얘기를 해볼게요. 타이틀곡 ‘에브리유’의 가사는 어떻게 떠올리게 됐나요?
예진 :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저는 음악이 나에게 어떤 영향이었는지를 생각하면서 쓴 곡이었어요.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당연히 이걸 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랑했는데, 직업으로 삼고 나니까 음악이 나를 무너뜨리는 일도 생기더라고요. 그게 인간관계에 적용됐을 때에도 똑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이든 연인이든 나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존재이지만, 그들이 나를 파괴시킬 수도 있다고요.

10. 가사는 다소 염세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곡의 무드는 우울하지는 않아요.
예진 : ‘에브리유’ 같은 경우는 단순히 슬픈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로맨틱하기도 하고 달콤하면서 씁쓸한 기분이라고 느꼈죠. 가사에는 나를 망친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멜로디 자체나 편곡은 밝게 했어요.

10. 반면 ‘내가, 네가’는 가사의 톤이 조금 달라요. 인류애가 느껴지죠. 거창한 질문이지만, 인간을 사랑하시나요?
예진 : 인간은 사랑하는 것 같아요.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그들을 이해 못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인간은 강인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선영 :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많이 받는 것 같긴 해요. 최근 미국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라운드제로를 방문했거든요. 9·11테러가 일어났던 곳이요. 정말 아름답게 꾸며놨더라고요. ‘얘들은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구나’ 감동을 받고 왔는데, 얼마 전 9·11 테러가 만들어진 일이라는 글을 봤어요. 음모론일 수 있지만 제법 신빙성이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인류’라는 집단을 사랑할 만 할까 의문이 들어요.

루싸이트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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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미국 여행은 음반 작업 중에 다녀온 건가요?
예진 : 작업 초반 단계에 다녀왔던 건데, 그 여행이 4집에 많은 영향을 줬어요.
선영 : 저는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게 ‘사람 목숨이 다 같은 게 아니구나’였어요. 너무 우울한 얘기인가요?(웃음) 여러 도시를 갔었거든요. 여러 인종, 여러 문화를 겪으면서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죠.

10. 그 생각이 음반 작업을 하면서도 그대로 남았나요? 아니면 마음속에서 또 다른 작용이 일어나던가요?
예진 : ‘내가, 네가’라는 곡이 그 복잡한 생각을 우리 식으로 해소한 곡이라고 생각해요. ‘인간 목숨이 다 같지 않구나’ 한탄을 하면서도, 어쨌든 인간의 가치는 다 같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이 위기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한 마음이 돼서 나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꿈을 노래로 만들었어요. 이 노래만큼 아름다운 상황이 벌어지지 않겠지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담은 거죠.

10. 아까 타이틀곡 ‘에브리유’를 처음 쓸 때 음악을 떠올렸다는 얘기를 했어요. 나를 만들기도, 망치기도 했다는 게 음악이란 말인가요?
선영 : 제 인생 자체를 많이 바꿔놓은 것 같아요, 음악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도 음악이고, 미래의 내 모습도 음악으로 인해 많이 바뀌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음악이 나를 채우는 것이기도 한데, 또 한편으로는 제가 음악으로 인해 포기하게 된 것들이 있잖아요. 가지 못한 길도 있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 부분도 있을 것이고…어떤 면에서는 나를 망쳐놓은 것 같기도 해요. 아마 무언가를 정말 깊이 생각하고 깊이 빠져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만한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

루싸이트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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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음악이 내게 미친 영향을 인식한 상태로 음악을 만들려면, 매 순간이 위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선영 : 아뇨, 사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까 더 놔버리는 게 있어요. 사실 이 주제를 불러온 건 예진이에요. 그런데 예진이 얘기를 들으면서, ‘해보지 않으면 모르겠다. 닥쳐오는 걸 더 해보자’는 생각이 오히려 더 많이 들었어요.
예진 : 연애를 할 때랑 비슷한 것 같아요. 누군가가 좋아서 계속 만났는데 그 관계가 너무 파괴적이라면, 거기에서 빠져 나오게 되잖아요, 필연적으로. 음악도 마찬가지에요. 나를 힘들게, 슬프게 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처럼 느끼는 거죠. 그래서 그냥 믿고 가보려고요.

10. 음악이 여러분을 힘들게 할 때에는 어떻게 극복했나요?
예진 : 오히려 더 음악 속으로 들어갔던 것 같아요. 더 많이 듣고 많이 만들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또 이상하게 다시 음악이 좋아지고 세상이 좋아 보이더라고요.
선영 : 저도 마찬가지에요. 사실 1~3집은 정말 그냥 그렇게까지 깊이 들어가 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음반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어요. “때려 쳐!” 하다가도, 뭔가에 깊이 들어가는 순간에도 음악이 있었고 빠져 나오는 순간에도 음악이 있기도 했어요.

10. 내년이면 데뷔 10년 차에요. 20대 때 상상했던 10년 뒤의 모습과 지금은 어떻게 다른가요? 또, 앞으로 10년 뒤의 모습은 어떨 것 같아요?
선영 : 그리 다르지 않은데 크게 다른 것 같아요. ‘10년 뒤면 몇 집 쯤 냈겠구나’ 라는 생각은 했는데, 이런 마음일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저 원래 음모론 같은 거, 전혀 믿지 않았거든요.(웃음) 이렇게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줄도 몰랐고요. 앞으로 10년 뒤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에요. 이 친구와 같이 음악을 해나갈 것이라는 것 밖에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할 거고요.
예진 : 그 땐 음반이 나왔다는 게 좋았다는 것도 몰랐어요. 이제야 음악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좋은 일이란 걸 깨닫고 있어요. 힘든 일도 많았고 현실적인 문제도 많았지만, 20대 때 생각한 것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10년 뒤는… 사실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을 항상 하고 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웃음) 하지만 저 역시 이 친구와 함께 계속 음악을 놓지 않고 사는 모습이길 바랍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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