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금산과 진시황의 인연


금산은 이 땅의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영토다. 그런데 금산에는 '부소바위'라는 게 있다. 진시황(秦始皇)의 아들 부소(扶蘇)가 유배당한 곳이라는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듯 전설은 대개 사실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부소바위의 유래만큼은 틀렸다. 부소는 진시황의 아들 20여 명 중 첫째다. 동생들과 달리 아버지가 하는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고 걸핏하면 반대했다. 참다못한 진시황은 장남을 멀리 쫓아버렸다. 그곳이 남해 금산인가. 아니다. 중국 북쪽으로 보내 변방을 지키도록 했을 뿐이다. 진시황이 급환으로 죽을 때까지 부소는 거기에 있었다.


금산에 있는 부소바위는 무엇인가. 진시황이 장남 이름을 하필이면 '부소'라 짓는 바람에 빚어진 오해일 따름이다. 요즘은 덜 하지만 옛날 우리나라는 모화(慕華)에 빠진 채 제 나라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비하했을 지경이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나머지는 죄다 오랑캐인데, 개중에서 비교적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족속이 동이(東夷)였다는 게 중국 생각이다. 중국의 동쪽에 살고 있는 오랑캐들, 동방예의지국의 정체다. 우리 역사는 몰라도 중국사는 정사에서 야사까지 두루 꿰고 있는 지식인들이 과거 왕조시대에는 많았다.


금산과 진시황이 하등 무관한 것은 아니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던 진시황은 서불을 인솔대장 삼아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바다 가운데 있는 삼신산(三神山), 오늘날의 금산으로 파견했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에 사는 신선(神仙)을 소년 소녀들을 데리고 가 모셔오려 한다”는 서불의 청을 진시황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이들 서불 일행의 목표는 딱 하나, 불로초(不老草) 채취와 불사약(不死藥) 확보였다. 그러나 금산 어디에도 불로초는 없었다. 서불은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사냥만 하다 금산을 떠났다.


아쉬움에 바위에 글을 쪼고 갔다.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 즉 '서불 이곳을 지나다'라고 새긴 바위다. 금산을 벗어난 서불은 제주도로 갔다. 진시황의 명령을 이행 못한 터라 귀국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은 '서불이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데서 비롯됐다. 성철(性澈) 스님은 서불과 함께 금산으로 온 일행을 동남동녀 각 3000명, 모두 6000명으로 봤다. 동시에 서불의 야욕도 간파했다.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진시황의 약점을 이용, 처녀 총각 6000명을 이끌고 남해 섬에 정착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생전의 스님은 또 “서불이 만든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도 있다”고 귀띔했다.


신화와 전설 혹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기 중 절대다수는 진실이다. 솔거(率居)의 '노송도(老松圖)'에 얽힌 전설은 사실인가. 이외수(李外秀)의 '벽오금학도' 또한 현실일 수 있는가. 신라(新羅) 24대 진흥왕(眞興王) 때 솔거가 황룡사(皇龍寺) 벽에 그린 노송도를 진짜 소나무로 착각한 새들이 머리를 부딪고 죽었다는 유명한 옛날 얘기, 난초 그림 향기로 병을 치료하고 마침내 사람과 그림이 하나가 된다는 이외수의 소설 벽오금학도의 팬터지….


이 같은 신비의 세계를 증명하는 일은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신비와 영혼의 세계를 증명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영혼의 세계를 몸서리치게 경험한 뒤 나를 찾는 이들을 숱하게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의 인연은 영적 교감을 통해 맺어진다. 영연(靈緣)의 시대다. 금산의 영기(靈氣)가 새로운 인연을 낳는다.


조세일보 / 차길진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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