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고용은 한국은행의 과업 아니다
정부들은 고용을 늘리겠다는 공약을 앞세운다. 공직 후보들도 고용을 놓고 경쟁한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꽤 그럴싸한 쇼다. 고용은 경제활동의 종합적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결과와 목표를 구분하지 못하고 상관성과 인과성도 혼동한다.

정부가 일자리 중시 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고용은 정부 개입적 정책과는 상관이 없다. 아니 정부가 일자리를 세는 동안은 나쁜 일자리만 공급될 가능성이 더 높다. 나쁜 일자리일수록 고용유발계수가 높다. 1억원으로 한 개가 아니라 열 개의 일자리를 만든다면 그런 일자리에서 지급 가능한 1인당 임금은 대체 얼마나 비참해져야 하나. 고용유발계수가 높아질수록 일자리의 질은 필연적으로 낮아진다.

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는 사실도 철칙이다. 정부도 공무원을 채용하지만 공무원을 많이 채용할수록 민간 시장에서는 승수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든다. 공무원을 많이 채용함으로써 고용 문제를 해결한다는 주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 한때 유행을 타기도 했다. 물론 가짜 이론이다. 공무원이나 사회적 기업 등의 소위 사회성 일자리 한 개가 만들어질 때 시장 일자리는 최소한 한 개 이상 파괴된다. 이들 일자리는 ‘조세소득 일자리’이기 때문에 ‘시장소득 근로자’들의 강탈당한 세금 위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지난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통화정책을 펴는 데 있어서 앞으로는 고용을 중시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내놨다. 정치권에서도 이미 중앙은행이 물가 외에 고용도 중시해야 한다는 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다. 미국은 이미 ‘고용과 물가’ 목표를 갖고 있다. 이 총재 발언은 과연 적절한 것일까. 아니다. 위험하다. 우선 물가와 고용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합적 목표가 아니다. 물가와 고용 즉, 물가와 성장은 상호 삭감되는 관계다. 고용을 추구하면 물가가 오르고 물가를 잡으면 고용이 줄어들 수 있으니 통화정책을 펴면서, 특히 그 모순에 유의해 적중(的中)의 균형정책을 취하라는 것이다.

물론 전통의 필립스 곡선은 의심받고 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아직은 중앙은행 독립성의 원천이다. 성장을 요구하는, 다시 말해 일자리를 요구하는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 고용과 물가의 긴장관계를 추구하도록 만든 중앙은행 제도의 출발점이다. 더구나 대부분 중앙은행들은 이미 성장(고용)정책에서 완패하고 있다. 아무리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의 통화정책이 증거해주는 그대로다. 심지어 금리를 마이너스로까지 만들어도 자금 수요가 없다. 자금 수요가 없다는 것은 기업 투자가 없다는 것이고, 기업 투자가 없으니 일자리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다. 일자리는 누가 뭐래도 기업 투자의 결과일 뿐 별 효과도 없는 통화정책의 결과가 아니다.

실은 물가목표제조차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1990년 뉴질랜드가 물가목표제를 도입한 첫 중앙은행이었지만 이후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아니 실패한 적도 없다. 물가목표를 가진 국가와 아닌 국가의 차별성도 없고 인과성도 입증된 적이 없다. 한마디로 돈이 과잉인 이 시대에 통화정책의 유효성 자체가 의심받는 상황이고 중앙은행 제도는 본질에서부터 도전받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중이다. 경기와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전망치조차 빗나가는데 고용목표를 세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돈을 푼다고 일자리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더 큰 문제다. 투자로부터 고용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강성노조들에 의해 차단돼 있다. 국내 노동시장의 과소고용도 이 때문이라 하겠지만 한국은행은 노동시장의 기득권 장벽을 돌파할 아무런 정책적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기껏 금리를 조정하거나 돈을 풀고 조이는 것으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일자리’는 중앙은행의 과업으로는 부적절하다. 한국은행은 수단도 없는, 능력 밖의 과업을 떠안지말라.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