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봄바람
며칠 따습다 했더니 바람끝이 다시 맵다. “춘분(春分) 햇살에 파종 준비 서둘러야 하는데 바람이 이렇게 차서야 원….” 농부들의 지청구에 먼저 나온 봄싹들이 움찔거린다. 오죽하면 ‘2월(음력)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뱃사람들도 이 무렵 샛바람이 불 때는 바다에 나가지 않고 바람 잦기를 기다린다.

봄바람은 부드러운 어감과 달리 제법 변덕스럽다. 그런 만큼 이름도 다양하다. 하늘거리는 ‘미풍’이나 솔솔 부는 ‘실바람’,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은 듣기만 해도 정겹다. 그러나 꽃을 시샘하는 ‘꽃샘바람’과 옷섶을 파고드는 ‘살바람’은 아주 매섭다. 회오리처럼 부는 ‘소소리바람’이나 좁은 틈으로 불어닥치는 ‘황소바람’ 못지않다. “봄바람에 여우가 눈물 흘린다”는 말도 그래서 생겼다.

바람이 아무리 변덕스러워도 계절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춘풍태탕(春風蕩: 봄바람이 온화하게 분다)’이라는 말처럼 만물을 깨어나게 하고 새싹을 밀어올리는 게 봄바람이다.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 봄바람이 불면 다시 돋아난다(野火燒不盡春風吹又生)’며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한 백거이의 시구도 마찬가지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봄은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우리에게 온다.

봄바람의 색깔은 분홍과 연두다. 연분홍 치마에 흩날리는 꽃잎은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여린 햇살을 튕겨내며 꽃가루받이에 분주한 벌 나비의 날갯짓은 봄바람 덕분에 더 맑고 아름답다. 꽃잎이 봉오리를 맺고 벙글었다 지는 동안 연초록 잎사귀를 준비하는 나무들의 줄기에도 따사로운 봄물이 오른다. 그 사이로 냉이 달래 쑥 향기가 아지랑이 들판을 간질이며 여린 손을 내민다.

이렇게 살아있는 모든 것을 깨우는 어머니의 바람이 곧 봄바람이다. 산들산들 봄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는 새 봄의 황홀한 자태. 그 바람 따라 흔들리는 건 꽃 나무만이 아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라는 노랫말처럼 봄바람은 ‘처녀바람’을 상징하기도 하다. 가을 타는 남자(男悲秋)보다 봄 타는 여자(女喜春)의 뉘앙스가 더 와 닿는 것은 봄기운의 춘정 때문이겠지만, 남녀 구분이 꼭 계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백이 ‘구름을 보면 그대 옷 생각/ 꽃을 보면 그대 얼굴 생각/ 창가에 봄바람 부니/ 이슬 맺힌 꽃송이 더 농염하구나’(청평조)라고 했듯이, 내일이면 이 바람끝으로 한결 더 농염해진 꽃송이가 우리에게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