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인공지능, '생각하는 갈대'의 피조물일 뿐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인간의 고안물은 인간의 피조물이다. 피조물로서 신을 경외하는 것은 뇌리 깊은 곳에 새겨진 문화적 흔적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고안물에 의해 지배될 것을 두려워한다면 이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반(反)문명적 사고의 발로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결과를 놓고 호사가들은 ‘인간이 기계에 지배되는 종말론적 세계’를 예언하기도 한다. 인간의 직업이 인공지능(AI)에 의해 대체되는 ‘인공지능 포비아’가 그려지기도 한다. 사라질 직업으로 의사, 회계사, 펀드매니저 등이 꼽히고 있다.

알파고는 학습을 할 수는 있지만 ‘직관과 창의성’은 없다. 알파고는 ‘정책망’과 ‘가치망’으로 이뤄진 ‘인공신경망’에 ‘머신러닝(기계학습)’을 더한 것이다. 정책망은 바둑의 전체 대국 상황을 살피고, 가치망은 한 수가 가져올 추가적 승률을 계산한다. 알파고는 이번 대국을 통해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수천수만 번의 계산 아래 가장 승리할 확률이 높은 수를 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최적화이지 결코 직관은 아니다. 학습을 통해 처리능력이 향상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인공신경망 그 자체가 강화되지는 않는다. ‘경우의 수’가 쌓일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행동을 통해 얻은 배움을 다른 행동으로 확장하지 못한다. 기계는 사유하지 못한다.

인간 기사와 알파고는 특성이 다르다. 기사는 연산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귀부터 두어 중앙의 다양한 변화의 수를 줄인다. 중앙에서의 세력이 ‘두텁거나 엷다’고 표현해 온 것도 수 계산이 정밀하지 못해서다. 연산능력에서 앞서가는 알파고의 기력은 중앙의 싸움에서 두드러졌다. 알파고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그럼에도 알파고는 여전히 인공지능이다. 백보다 흑을 힘들어한다. 선수(先手)를 두기보다 선수에 반응하는 것을 선호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수가 나왔을 때는 ‘버그’로 의심되는 수가 나오기도 했다. 이는 기존에 입력되지 않은 수를 두었을 때 마땅한 대응수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벽한 인공지능이었다면 이번 대국에서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구글 딥마인드가 4국에서의 알파고 패배를 ‘소중하다’고 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인공지능은 이제 시작 단계다. 자율주행차와 의료분야로까지 인공지능이 확대됐을 때 버그가 가져올 재앙과 위험은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은 윤리적 측면과 기술적 측면에서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은 향후 원격진료, 맞춤형 의료, 일기예보, 자연재해 예측 등으로 무궁무진하게 뻗어 갈 것이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으로 동일본 대지진을 예측할 수 있었다고 가정하면 피해를 크게 줄였을 것이다. 재판에 인공지능의 예측을 참조한다면 판사의 편향성 논란도 크게 덜 수 있다.

이번 대국의 최대 수혜자는 구글이다. 구글은 이번 이벤트로 인공지능 분야에서 IBM ‘왓슨’을 제치고 세계 랭킹 1위 이미지를 굳혔다. 초일류 인공지능 전문가들이 구글로 모여들 것이다. 향후 인공지능산업에서 구글이 주도권을 쥘 것은 불문가지다. 구글이 내건 상금은 고작 100만달러였다. 알파고가 프로 9단이었다면 구글은 마케팅 10단이다.

알파고 충격으로 국가적으로 인공지능을 키워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하지만 국가 지원이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미국 정부가 구글을 키운 것이 아니다. 구글이 인공지능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딥마인드’를 인수합병하지 않았다면 알파고는 세상에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업 생태계와 기업의 혁신 능력이 관건인 것이다.

인간은 비록 뇌용량은 제한적이지만 합리적으로 판단하도록 진화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생각(사유)하는 갈대’이기 때문이다. 1차 산업혁명이 인간의 근육을 대신했다면, 4차 인공지능혁명은 인간 두뇌의 제한적 합리성을 완화해 다양한 판단의 준거를 제시함으로써 의사 결정의 오류를 줄이고 적합성을 높일 것이다. 인공지능은 바야흐로 인류의 조력자가 될 것이다. 인류 두뇌의 확장이자 지성의 도약이다. 미증유의 고도화된 신문명이 펼쳐질 것이다.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객원논설위원 dkcho@mj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