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확대재정정책을 생각한다
세계 경제가 심상치 않다. ‘대침체(Great Recession)’란 말이 나왔을 때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로부터 9년이 지났는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930년대 대공황이 10년 정도 지속된 것을 생각하면 위기의 심도는 그때보다 떨어지지만 기간은 더 길어질 것 같다.

대침체는 어떻게 시작됐나. 미국 정부가 서민들에게 돈을 빌려 집을 사라고 권한 정책이 금융회사의 온갖 도덕적 해이와 결부돼 글로벌 금융위기를 일으킨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위기가 대공황처럼 안 되고 대침체로 가게 된 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미국이 급속히 정책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내리고 양적 완화로 돈을 대폭 풀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중국의 존재다. 중국은 2007년에 이미 세계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미국보다 올라간 상태에서 국영은행을 통해 대출을 무한정 늘렸다. 2009년에는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을 50% 늘려서 사상 최대의 재정확장정책을 폈다.

유럽과 일본은 몇 년 뒤에야 금리를 내리고 양적 완화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것도 과감하게 하지 못하더니 디플레이션 위협에 직면하자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그 약발이 먹힐지는 의문이다. 일본에서는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자 엔화 가치가 되레 오르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투자자들이 일본은 더 이상 쓸 카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 중국 경제의 감속이 겹쳤다. 중국은 원래 2008년께 구조조정으로 숨고르기를 할 작정이었는데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확장정책에 가속 페달을 밟았던 것이다. 그것은 지속될 수 없는 정책이었다. 그 결과 지금 감속성장과 함께 과다차입·과잉투자 후유증이 심각하다. 최근에는 자본시장을 연 것이 화근이 돼 외환위기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런 식이니 대침체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제 각국의 대응책이 바닥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침체를 극복하는 데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재정정책이다. 미국의 경우 누더기 고속도로와 느려 터진 철도를 고치는 데 재정을 투입하면 당장 경기를 회복시키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독일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다. 낡은 교량과 도로 개·보수 등 할 일이 많다.

재정정책을 뒷받침할 세입은 어디서 나오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일으킨 장본인인 금융자본에 과세하면 된다. 국내적인 금융거래세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하루에 수조달러씩 거래되는 외환거래에 과세하면 엄청난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재정정책이 아니라 통화정책 쪽만 쳐다보고 있으니 대응책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통화정책도 중요하고 구조개혁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재정정책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재정정책은 노후한 SOC를 개·보수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할 것 같다. SOC 신규 투자는 이미 포화상태지만, 노후한 SOC 개·보수가 시급한 것은 미국이나 독일과 마찬가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2만1053개 SOC 인프라 중 30년을 초과한 것이 2161개에 달한다.

미국이나 독일이 재정정책을 쓸 수 없는 이유는 경제 이론보다 정치 현실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재정 지출도 그렇지만 세수를 위해 금융자본에 과세하는 것은 ‘그림의 떡’이다. 국제적으로 외환거래에 과세하는 방안도 미국의 반대로 토의조차 안 됐다. 이것은 불공정하지만 현실이다. 정치 현실이 중요한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재정으로 할 일이 많지만, 교육이나 복지 등보다 논란의 소지가 적은 것이 SOC 개·보수다. 세수의 경우 한국은 꼭 필요한 부담이라면 나눠서 지는 쪽으로 합의할 능력은 있어 보인다.

당장 올해도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지금부터 생각해야 할 일이다. 온 나라가 총선으로 들떠 있는 동안 이런 문제를 챙기는 곳이 있어야 한다.

이제민 < 연세대 명예교수·경제학 leejm@yonsei.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