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중명전.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고종을 협박했지만 고종은 어전회의에서 을사늑약 서명을 거부했다.
덕수궁 중명전.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고종을 협박했지만 고종은 어전회의에서 을사늑약 서명을 거부했다.
역사적 사건 가운데 원인이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은 별로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건이 원인이 있어서 만들어진 결과지요. 고종이 임금으로 있는 동안 수많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사건들이 한결같이 조선 혹은 대한제국의 망국을 재촉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친러 정권이 세워졌습니다. 러시아는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군주를 1년 동안이나 자신들의 공사관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러시아는 조선에서 확실하게 세력을 뿌리내린 듯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일본의 의지는 그보다 더 확고했습니다.

조선은 요충지…러·일 각축전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부설 등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과 타협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두고 일본과 러시아는 한판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러시아에도 일본에도 한반도를 양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에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이른바 부동항(不凍港)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유럽 쪽으로 진출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 의해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보기에 한반도는 부동항이 줄지어 있는 훌륭한 장소였지요. 게다가 당시 러시아 안에서는 곧 혁명이 일어날 듯 불만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황제는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한편 일본은 좁은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북진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본에도 한반도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요충지였지요.
러·일 전쟁에서 일본에 승리를 안겨준 만제키세토 운하.
러·일 전쟁에서 일본에 승리를 안겨준 만제키세토 운하.
러·일 전쟁 시작…바람 앞 등불 신세

1904년 2월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러·일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은 인천 앞바다에 있던 러시아 군함 두 척을 격침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지요. 중국의 뤼순과 랴오둥반도 등에서 일본은 러시아에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모두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말입니다.

우선 일본은 전쟁을 치를 돈이 부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간도, 비용도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 소모하고 말았습니다. 또 보급로가 드러난 것도 커다란 약점이었지요. 러시아 역시 더 이상 전쟁을 치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1905년 국내에서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에 두 나라는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다른 나라에 중재를 요청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마지막 전투가 1905년 5월에 치러진 대마도 해전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육지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동쪽에서 위용을 떨치던 발트함대를 불러왔습니다. 발트함대는 러시아가 지닌 최고의 정예 함대였지요. 발트해에서 아시아 쪽으로 오는 지름길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에 권리를 가지고 있던 영국이 발트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막았습니다. 발트함대는 아프리카 남쪽 끝 희망봉을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의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온 셈이지요.

무너진 러시아 발트함대

이런저런 이유로 발트함대는 발트해의 크론슈타트 항을 떠난 지 9개월 만에야 일본 근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함대의 군인들은 지칠 대로 지쳐버렸습니다. 러시아 함대는 대마도와 일본 사이에 있는 대마해협으로 곧장 들어갔습니다. 그때 일본의 주력 함대는 우리나라의 남해안 진해만에 있었지요.

러시아 함대는, 일본 함대가 자신들에게 대항하려면 대마도를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러·일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 전쟁에 대비해 대마도의 허리를 자르는 널찍한 운하, 만제키세토(万)를 파 두었습니다. 일본 함대는 이 운하를 통해 재빨리 발트함대를 치러갈 수 있었습니다. 24시간 동안 계속된 해전에서 일본은, 이미 기진맥진한 발트함대를 크게 물리쳤습니다. 대마도 전투를 마지막으로 러·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쟁의 뒷정리를 위해 포츠머스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지요. 이 회의 결과 러시아는 일본에 사할린 남부를 내줘야 했고 한반도에서 손을 떼게 됐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강대국 나눠먹기

러·일 전쟁은 대한제국이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결국 일본만이 한반도에서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후 일본은 한반도 침략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우선 다른 강대국의 반발을 사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지요. 일본 외무부 장관 가쓰라는 미국의 국무장관 태프트와 비밀 약속을 했습니다.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대한제국을 지배하고 서로 이를 눈감아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른 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지요. 영국에도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 조치를 승인받았습니다. 영국이 청나라와 인도에서 이익을 취하는 것을 인정해준 대가입니다.

일본은 그 해 11월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을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했습니다. 을사늑약의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이 우리의 정치에 간섭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 을사늑약으로 한반도에서는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글=황인희 / 사진 =윤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