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흑백영화에 담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영화 ‘동주’를 보고 왔습니다. 윤동주 시인(1917년 12월30일~1945년 2월)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로,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윤 시인과 함께 순국한 사촌 송몽규(1917년 9월28일~1945년 3월7일)의 생애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최근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흑백으로 펼쳐진 화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총 제작비가 5억원에 불과한 저예산 영화여서, 거리 소품, 의상, 거리 재현 등에 큰 예산을 들일 수 없었던 감독의 ‘현실적 고뇌’가 느껴졌습니다만,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청년 시인의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오히려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아닌 영화로 만든 전기

최근에는 영화로 쓰여진 전기(傳記)가 많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바이오그래피컬 필름(biographical film)이라고 하지요. 최근에 나온 전기 영화로는 ‘링컨’, ‘잡스’, 프랑스 샹송가수 피아프의 일대기 ‘라 비앙 로즈’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위인이나 기억할 만한 사람들의 생애가 책이 아닌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것 자체가 시대가 변했다는 신호입니다. ‘진지한 정보’를 취득하는 통로가 다양해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원시시대 이래 몸짓언어, 음성언어, 문자언어를 발명하며 의사소통 수단의 진화를 이룩했습니다. 후자로 갈수록 보다 정교하고 복잡하며 많은 용량의 정보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문자언어에 비해서는 음성언어가, 음성언어에 비해서는 몸짓언어가 더 배우기 쉽고 인간의 본성과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인간 본성’ 몸짓을 담는다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흑백영화에 담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기술이 인간의 본성을 담기에는 충분하게 발달하지 못했는데, 최근 들어 획기적인 수단이 태어났습니다. 인터넷과 휴대폰 발명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송하는 일이 가능해졌지요. 저는 이 현상을 ‘몸짓언어의 부활’이라고 정의합니다. 몸짓언어가 번성할 수 있는 ‘대중적 기록, 저장, 전파’의 수단이 사람들 사이에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래시대에는 문자보다 동영상이 번성하리라고 예측합니다.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은 ‘문자’를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언어이고 문자는 단지 언어의 기록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언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동작, 표정, 기타 여러 가지 행위도 의사전달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발아한 학문이 기호학입니다. 예컨대 영화감독이 잡은 특정 화면에 인물과 대사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일반인들이 일상적인 차원에서 통신, 녹음, 녹화 및 모든 정보를 실시간 전송·공유·확산할 수 있는 휴대폰 보급은 인류가 정보를 전달하는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만큼 인류사에 혁명적인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영화 ‘동주’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영화 서두에 ‘사실에 바탕을 두었지만 영화적 허구가 섞여 있다’는 자막이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영화적 표현을 몇 장면 비교해 보겠습니다. 윤동주 시인과 데이트하던 여성이 두 분 나옵니다만, 둘 다 가상의 인물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정지용(1902~1950) 시인을 직접 만난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영화 말미에 ‘정지용 서문을 붙여 윤동주 시집이 간행되다’라고 나오지요.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1936년 《정지용 시집》을 정독하고 정지용 시인을 흠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두 분의 인연은 윤동주 시인 사후에 비로소 이뤄집니다. 1947년 2월13일 경향신문에 ‘쉽게 씌여진 시’가 해방 이후 최초로 발표되는데 이때 정지용 시인이 소개문을 씁니다.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의 서문도 정지용의 것인데, 이 글 속에서 정 시인은 ‘생전에 윤동주 시인을 만난 일이 없다. 그래서 성품은 어떠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몸은 건강했는지를 시집 원고를 가지고 온 시인의 동생에게 물어본다’고 적어놓았습니다. ‘누가 셔츠를 벗어달라면 그냥 벗어줍니다, 중학교 때 축구선수였습니다’가 답변이었지요.

생전에 만나지 못한 정지용과 윤동주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흑백영화에 담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교분은 없었지만 일본 교토에 있는 기독교계 대학인 도시샤대 동문이라는 인연이 있습니다. 캠퍼스 안에 두 시인의 한글 시비(詩碑)가 서 있습니다. 혹시 방문할 일이 있거든 두 분 모두를 뵙고 오세요. 6·25전쟁 중 정지용 시인이 납북되는 바람에 1955년 《시인 사후 10주기 기념 개정판》에는 정지용 시인의 서문이 빠졌습니다. 최근에 나온 55년 복각판에 정지용 시인의 서문이 없는 이유입니다. 영화 말미에 숭실대 신사참배에 항의해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자막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는 평양 숭실대 부설 중학부, 즉 지금의 고등학교였습니다. 1936년 3월 말 숭실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를 당합니다. 학교가 없어졌기에 시인은 애교심을 가졌던 숭실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하지요. 이 무렵 용정 외가에 와 있던 동요 시인 강소천(1915~1963)과 교우합니다.

연희전문 졸업 무렵 출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던 시집의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습니다.

필사본 3부 가운데 외우 정병욱이 보관했던 판본만이 극적으로 살아남아 윤동주 시인의 작품이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는 언젠가 기회를 보아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설가 송우혜는 송몽규의 조카딸, 통기타 가수 윤형주는 윤동주 시인의 6촌 동생이라는 사실도 알려 드립니다.

장원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