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속자생존의 시대"…산업 생태계가 바뀐다
“이제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니라 속자생존(速者生存)의 시대다. 가장 빠르게 적응하는 산업만이 살아남는다. ” 한국경제신문 주최로 지난 2월 25일 열린 ‘한경 밀레니엄포럼’에서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한 말이다. 산업 생태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철강·화학 등 기존의 전통적 산업은 성장의 모멘텀이 약해지는 징후가 뚜렷하다. 조선업계는 지난해 8조원이 넘는 적자를 냈다. 1년만에 자동차는 5조원, 전자는 4조원 어치의 재고가 늘었다. 공장가동률은 금융위기 이후 최저수준이다. 반면 신성장 산업은 활짝 열리지 않고 있다. 바이오·제약은 나름 성과를 내고 있지만 사물인터넷·인공지능·자율운행자동차 등 첨단 IT·소프트웨어는 미국 등 선진국에 한참 뒤지는 상황이다.

공장 가동률 급락…기로에 선 전통 산업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공장 가동률은 전통적 산업의 성장세가 한계에 왔음을 시사한다. 2011년 82.6%에 달한 공장 가동률은 79.6%(2012년)→78.8%(2013년)→77.9%(2014년)→73.9%(2015년)→72.6%(2016년 1월)로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재고가 쌓여 가동을 멈춘 공장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다. 통상 생산이 줄면 재고가 감소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수출과 내수가 동시에 부진에 빠지면서 공장 가동률이 떨어져도 재고는 늘어난다. 기업 경영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500대 기업 중 보고서(2015년 3분기 기준)를 제출한 275개 기업의 재고자산을 분석한 결과 자동차부품업종의 재고자산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5조636억원 증가했다. 정보기술(IT)과 전기·전자업종도 3조9830억원 늘었다. 재고가 쌓이는 것은 수출 부진 탓이 크다. 지난 1월 제조업의 수출 출하량은 전월보다 6.5% 감소했다. 2008년 12월 이후 최대 감소폭이다.

제조업 가동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재고가 늘어나는 건 조선, 철강, 화학,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산업 생태계가 변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국 실리콘밸리 첨단 기업들은 이미 AI·바이오·IoT·3차원(3D)프린터·빅데이터·자율운행자동차로 산업 생태계를 빠르게 넓혀 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조업 가동률 하락과 재고 증가를 내수·수출 부진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구조개혁이나 신산업 개척으로 돌파구를 찾으라고 지적한다.

‘통화 약세=수출 증가’ 공식 깨져

수출은 지난해 1월부터 14개월 연속 감소했다. 지난해 12월부터는 3개월 연속 두 자릿수 감소다. 올 2월 수출은 선박(-46%·전년 동월 대비), 석유제품(-26.9%), 평판디스플레이(-22.1%), 가전(-13%), 반도체(-12.6%)가 모두 두 자릿수 줄었다. 자동차 수출도 9.3% 감소했다. 수출이 곤두박질치면서 올해 정부가 목표한 성장률(3.1%) 달성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 수출이 늘어난다는 전통적 공식도 통하지 않고 있다.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 인도네시아 등은 최근 수년 동안 자국의 통화 가치가 크게 하락했지만 수출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국의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품의 가격 인하 효과가 생겨 수출이 늘어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국의 원화 가치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로 떨어졌고, 인도 루피화도 2013년 이후 최저 수준을 보이는 등 대부분의 신흥국 통화 가치가 크게 하락했지만 (수출이 증가하는) ‘경제원론’식의 결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경제의 성장세 둔화, 유가 하락에 따른 수출 환경 악화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신성장 산업’ 싹 틔워야

첨단기술 시대는 먼저 시작한 자와 뒤따라가는 자의 간극이 갈수록 벌어진다. 스마트폰을 처음 만든 건 애플이다. 삼성은 절치부심 애플을 따라잡았다. 삼성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퍼스트 무버(first mover)를 따라잡은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데이터와 디지털이 근간이 되는 첨단기술 시대에는 ‘데이터의 눈덩이 효과’로 1등과 2등의 격차는 갈수록 커진다. 선점 효과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구글의 자율운행자동차는 300만㎞ 이상을 달렸다. 구글은 수년 내 상용화를 자신하고 있다. 한국은 아직 걸음마도 제대로 떼지 못한 상태다. AI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는 미국이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은 미국 AI의 기술 수준을 100으로 했을 때 한국은 73.1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정보통신기술(ICT) 시대에 신성장 산업의 발굴에 뒤지면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지난해 글로벌 제약사들과 수조원대의 기술 수출을 맺은 한미약품, 미국에서 최초로 바이오시밀러(항체의약품 복제약)를 인정받을 것이 확실시되는 셀트리온은 한국도 미래의 신성장 산업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적 증표다. 생태계가 변하면 바뀐 생태계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