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경제 악몽 자초하는 부류들
집안 어른들로부터 6·25전쟁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어릴 적 악몽의 주제는 항상 전쟁이었다. 중공군을 피해 도망가다가 시체를 덮어쓴 채 몇 시간이고 있었다는 대목에서는 공포가 극에 달했던 기억이 난다. 커 가면서 악몽의 주제는 계속 바뀌었는데 최근엔 심한 악몽을 꾼 기억이 없다. 그런데 최근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는데다 우울한 국내 정치·경제 상황까지 겹쳐 또다시 악몽을 꾸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2008년엔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유럽 재정위기로 번졌는데, 최근엔 중국 경제 성장세 둔화와 국제 유가 하락으로 신흥국 경제가 무너지면서 글로벌 경제의 장기 침체를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됐다. 무엇보다 이 위기의 해결사여야 할 중국의 정책 대응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주식시장의 거품을 방치하고 있다가 부양책을 남발하는 중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 있다. 이미 양적 완화 정책을 쓸 만큼 쓴 유럽과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 카드까지 꺼내들고 경기 부양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지난해 말 9년 만에 기준금리를 올린 미국은 올해도 네 차례 정도 금리를 더 올릴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등 글로벌 금융위기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새해 벽두부터 요동쳤던 중국 증시 불안과 12년 만에 바닥으로 추락한 국제 유가로 인해 글로벌 경제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기대했던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장 회의는 지난달 27일 통화·재정 등 모든 정책 수단을 총동원하기로 합의한 채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각국이 정책 수단을 총동원한다는 것은 역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니 각자도생하라는 얘기와도 같다. 심하게 표현하면 이제부터 각국은 근린궁핍화를 초래하는 ‘환율 전쟁’을 하라는 신호탄이지 싶다. 이 와중에도 중국은 그동안 무역을 통해 쌓아 둔 돈으로 자원·농산물·에너지 중심의 투자방식에서 벗어나 세계적 경기 침체에 따른 구조조정 상황을 파고들며 거대한 기업 인수합병(M&A)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 나름대로 선방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발표한 수출 실적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은 지난해 5269억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세계 12위에서 6위로 여섯 계단 뛰어올랐다. 4위인 일본의 6251억달러와 981억달러 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몽을 떠올리는 것은 여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인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자국 이익을 위해 거침없는 행보를 불사하는 중국에 비해 한국의 정치권은 복합적 실물경제위기의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구조조정을 돕겠다고 마련한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을 비롯해 19대 국회 회기 내에 통과가 불투명해진 노동개혁 4법과 서비스산업발전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회 논의 과정에서 누더기가 돼 버렸다.

당장 올해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의 정년이 60세로 늘어나면서 젊은 세대를 위한 신규 채용에 대한 우려가 큰 데도 노동개혁 논의는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청년실업, 자영업, 가계부채, 기업구조조정 등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는데 당리당략만 앞세운 채 경제 발목잡기 경쟁에만 매달리는 듯한 인상이다. 남은 경제활성화 관련 법들이 이번 회기에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사실상 폐기 수순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4차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따른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력한 대북(對北)제재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되며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더 커지고 있다. 동력을 잃고 있는 경제에 대한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지만 그동안 그래왔듯이 ‘대충주의’에 젖어 무감각해진 상태다. 정치권은 언제나 제 밥그릇 챙기기에 함몰돼 있고, 선거 정국으로 경제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 경제는 회복 불능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경제 악몽은 지금 끊어내야 한다.

이인실 <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