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숨은 경제이야기]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이유가 된 조세제도
미국의 독립선언문 작성에 기여한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일찍이 "이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 이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죽음과 세금은 회피하려 하여도 언젠가는 반드시 맞닥뜨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죽음은 인간이 지닌 숙명이니 피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손치더라도 세금도 과연 그럴까?
[역사 속 숨은 경제이야기]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이유가 된 조세제도
소득이 있는 일국(一國)의 국민이라면 세금을 납부할 의무를 지닌다. 물건을 구매할 때 세금을 내야 하고, 재물이나 재산을 취득할 때도 세금이 부과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거 일부 국가에서는 주택에 설치된 창문의 개수, 사람이 기르는 수염, 집에서 키우는 가축(소)이 내뿜는 방귀에 대해서도 세금을 징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쯤 되면 일상의 모든 것이 세금과 관련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처럼 광범위한 국민의 활동에 대해 정부가 세금을 부과하는 이유는 정부가 지닌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즉, 세금은 정부가 나라의 경제를 관장하고, 안보를 수호하며,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루는 데 수단이자 재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금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다. 하지만 이는 세금제도의 운용이 문란하고 조세 징수의 형평이 붕괴되면 국가라 할지라도 멸망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고려(高麗) 왕조다.

918년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해 건국한 고려 왕조는 그 후 400여년간 한반도의 주인으로 자리잡았으나 이성계(李成桂)로 대표되는 혁명세력에 의해 1392년 조선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소위 여말선초(麗末鮮初: 고려 말 조선 초)로 불리는 격동의 왕조교체기에 그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부패한 세금제도였다. 농업사회였던 고려시대 후기 백성들은 농사지어 거둔 곡식(소출)을 땅주인인 지주와 나눠 갖고 그 일부를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교통과 유통이 발달하지 않아 중앙정부에 직접 소출을 납부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웠고, 정부 역시 소출량을 정확히 측정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벼슬아치들에게 수조권(收租權)을 주어 조세, 즉 곡식을 거둘 권리를 부여했고, 백성들은 이들에게 소출을 납부함으로써 정부에 내야 할 세금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때 소출이 중앙정부에 납부되는 땅을 공전(公田)이라 하였고, 벼슬아치들에게 납부되면 그 땅을 사전(私田)이라 불렀다.

고려 말의 이런 세금제도는 일견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합리적 시스템으로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시스템은 합리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수조 권한이 남용돼 문란하게 운용됐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당시 관리들의 수조권은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퇴직 후에도 관리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수조권을 유지하려 했고 심지어는 자식 세대로까지 세습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퇴직으로 공석이 된 자리에 새로운 관리를 계속 임명했고 그들에게도 당연히 수조권이 부여됐다. 상황이 이러자 하나의 땅에서 소출을 받는 관리가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하는 일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직업을 아예 바꾸는 일도 생겨났고, 심하면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려 말 지배세력을 가리켜 흔히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 하는데, 이들은 수탈과 겸병을 통해 토지를 불법적으로 획득해나갔다. 종국에는 이들이 소유한 토지의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해 그 경계가 논과 밭이 아닌 산과 강으로 구분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고려 왕조의 곳간이 텅텅 비게 된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이고, 소출이 근간이 되는 국가 재정 역시 부실화됐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역시 치국(治國)의 근본은 백성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고려 말 당시 백성들은 송곳조차 꽂을 곳 없는 작은 땅에서 거둔 소출로는 수조권을 채우기에 급급했고, 중앙정부는 재정이 바닥나 새로운 관리조차 임명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꿈꿨다. 그 첫걸음으로 정도전이 주목한 것이 바로 토지제도의 개혁이다. 당초 그가 목표로 한 토지제도는 ‘계민수전(計民授田)’을 통한 ‘정전제(井田制)’였다.

여기서 계민수전이란 말 그대로 백성을 수를 세어 농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것이고, 정전제란 고대 중국의 토지제도로 농토를 우물정(井) 자 모형으로 9등분한 뒤 외곽 토지는 8명의 개인에게 각각 나눠주고 중앙 토지는 이들에게 공동 경작하도록 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개인의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고, 세금은 중앙의 토지를 공동 경작해 거둔 곡식으로 낼 수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당시만 해도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이런 토지개혁을 위해 기존의 토지대장을 불사르고 새로이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는 사업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그가 바라던 것은 전국의 사전을 폐지하고 모든 토지를 공전화, 즉 국가의 소유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계민수전과 정전제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막강한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권문세족이 자신들의 경제권을 앗아가려는 정도전의 의도에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대신 당시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의 휘하에 있던 조준(趙浚)이 대안으로 제시한 과전법(科田法)이 시행됐다.

1391년 반포된 과전법은 백성에게서 소출을 받을 수 있는 수조권을 직급에 따라 관리들에게 나누어주는 제도를 말한다. 하지만 이런 토지의 범위를 경기도 땅으로 국한했고 나머지 지역의 토지는 모두 정부가 소출을 거두는 국가의 소유로 뒀다. 백성들이 납부하는 소출의 양도 수확량의 1할(10%)로 제한했으며 수조권을 가진 관리 역시 백성에게서 받은 소출의 일부를 세금 형태로 다시 국가에 납부하도록 했다.

과전법은 비록 정도전이 이상향으로 삼았던 토지제도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토지개혁 조치였고 결국에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전이 공전화되면서 권문세족의 재정적 기반이 쇠약해진 반면 옛 체제에 반대하던 신흥무장세력과 신진사대부의 경제력은 강화됐기 때문이다.

이성계 일당이 불합리한 소출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 백성의 민심을 얻게 된 것도 과전법 시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결국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이 같은 커다란 역사의 흐름 이면에 바로 세금이라는 경제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이다.

정원식 KDI연구원 kyonggi96@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