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의 조직 형태는 근로자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

지난 1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요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래서 너무나 교과서적인 얘기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를 구성하고, 이례적으로 공개변론 절차를 거치는 등 신중에 신중을 더했다. 그래서일까. 이번 판결이 던진 파장은 매우 컸다. 일부에서는 노동계의 지형을 바꿀 거라고도 하고, 노동계는 ‘노조 죽이기’ 판결이라며 펄쩍 뛰고 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일까. 노동조합의 조직 형태는 다양하다. 산업별 노조가 있고 기업별 노조도 있다. 직종별 노조도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산별노조가 주된 형태다. 한국은 다르다. 금속노조 같은 산별노조가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는 기업노조다. 노동조합이 어떤 조직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이 제 역할을 충실히 실행할 수 있는 최적의 조직 형태인지 여부다. 노동조합을 결성할 때도 그렇고, 사후적으로 조직 형태를 변경하는 경우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번 판결은 노동조합의 조직 형태 변경에 관한 것이었다. 사건 내용은 대략 이렇다. 발레오전장 노조는 원래 기업노조였다. 그러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조직 형태를 변경했다.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에 가입한 것이다. 이로써 발레오전장 노조는 금속노조의 ‘지부’가 됐다.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집행부와 갈등을 거듭하던 중 발레오전장 노조가 자체 총회를 열어 금속노조 탈퇴를 결정했다. 당시 총회에는 지부 조합원 601명 중 550명이 참석했고, 97.5%인 536명이 기업노조로의 변경에 찬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속노조는 조직변경 절차의 합법성을 문제 삼아, 발레오전장 노조의 변경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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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노조법 16조'가 논란 진원

현행 노조법 제16조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총회 의결을 거쳐야만 조직 형태 변경이 가능하다. 발레오전장 노조는 금속노조의 지부일 뿐이다. 발레오전장 노조의 자체 총회는 따라서 노동조합 총회로 보기 어렵다는 논리다. 금속노조의 총회 의결을 얻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 1심과 2심은 금속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법리는 제쳐놓더라도 이런 하급심 판결은 직관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가입할 때는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탈퇴할 때는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는 식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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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노조법 제16조의 입법 배경이다. 1980년 노조법이 개정되면서 노조의 조직 형태가 강제됐다. 기업노조로 말이다.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군사정부의 조치였다. 노동 악법으로 지목됐던 조직 형태 강제 규정은 1987년에 이르러 삭제됐다. 산업민주화 운동의 성과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부분 노동조합이 여전히 기업노조 형태를 유지했다. 파편화한 기업노조 형태보다는 단일화한 산별노조가 교섭력에서 월등히 우세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노동계의 아쉬움은 컸다.

법제도적 장벽도 한몫했다. 산별노조로의 전환은 간단치 않았다. 기존 노조를 해산하고, 새로 산별노조를 결성하고 가입하는 일은 번거로웠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 바로 노조법 제16조다. 노동조합의 총회 의결 절차만 거치면 조직 형태를 변경할 수 있도록 입법화했다. 1997년의 일이다. 이 규정이 오늘날 이렇듯 복잡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줄은 미처 몰랐다. 조직 형태 변경은 산별노조로의 변경이 전부는 아니다. 산별노조를 탈퇴하기 위한 조직 변경도 있을 수 있다. 이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때는 그랬다.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기존 판례법리를 변경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헌법상 보장된 단결권 보장 원리에 비춰 볼 때 산별노조로 변경하든 기업노조로 변경하든 그 조직 구성원인 조합원의 진정한 의사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을 따름이다. 이런 맥락에서 산별노조 지부의 ‘실체’를 면밀히 살펴보도록 했다. 단체협약의 주체는 아니더라도 독립된 근로자 단체라면 노조의 조직 형태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봤다. 하급심 판결과 다른 점은 바로 이 대목이다.

"강성 투쟁 토대 무너질 것"

대법원 판결로 인해 산별노조의 토대가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몇몇 대법관은 소수 의견으로,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촉발을 경고하고 있다. 기업노조로의 변경을 유도함으로써 사실상 산별노조를 와해하고자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노동계가 대법원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사실 이번 판결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진짜 메시지는 따로 있다. 노동조합에 자기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그동안 대외적 자주성과 투쟁력 강화에만 몰두했다. 그 덕에 1980년대 이후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 대신 과소평가하거나 소홀히 했던 부분도 있다. 바로 노동조합의 내부 운영원리다.

노조법은 ‘투명성’과 ‘민주성’을 노조 운영 원리로 제시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이런 원리는 늘 뒷전이었다. 엄혹한 노동 현실을 고려해 보면 내부 운영 원리까지 챙기기에는 벅찼을 수도 있다. 자기이익만을 위한 맹목적 정치투쟁으로 해당 기업과 국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일도 많았다.

노조 구성원 의사에 주목해야

지금은 다르다. ‘나를 따르라’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노조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고충에 시달리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고 반영해야 한다. 노조의 정책과 결단은 우선 조합원들부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조합원이 노동조합을 탈퇴하려 한다고 해서, 그 원인을 오로지 사용자에게로만 돌리려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왜 탈퇴하려 하는지를 곰곰 살펴보는 자기성찰이 우선돼야 한다. 그게 순서요 도리다.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 원리는 노동조합의 성장과 지속가능한 영향력 확대의 원천이다. 그동안 구성원의 의사를 반영하는 데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 한번쯤 되돌아봤으면 한다. 이번 판결이 부디 노동조합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 노동조합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권 혁 <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