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마이너스 금리, 도덕성을 파괴한다
역사의 긴 기간 동안 대부 이자는 아주 자비로웠을 경우 연 10%였다, 세금도 10%에 수렴됐다. 기독교의 ‘십일조’는 카이사르와 하느님이 금화에 대한 소유권을 다투었을 때조차 10%였다. 아마도 농업이 산업이 된 이후 1만년 동안 농업사회의 잉여 생산물이 총생산의 10% 범위를 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잉여생산의 총량이야말로 조세 및 이자의 자연적 한계였던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이상적인 토지제도라고 간주됐던 정전제(井田制)로 추정컨대 국가에 바치는 공납은 토지를 우물 정자 형태로 구획해 생겨난 9개 구획 중 한 덩어리, 즉 9분의 1이 목표였다. 조선 후기의 정다산(丁茶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지식인들은 이 정전제를 온당한 농업사회의 조세제도로 여겼다.

이슬람에서는 저율의 보편적 인두세를 최고의 세제로 쳤다. 이슬람은 이 저율의 인두세 하나로 전쟁을 최소화하면서 천하를 통일했다. 이슬람의 지배는 칼도 코란도 아닌, 알고 보면 낮은 세율이었다. 오늘날 주요 국가들의 소득세가 40%에 수렴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세금에서만큼은 지금이 역사상 가장 혹독한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국가와 동업한 적이 없건만 세금은 거의 동업자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이처럼 가파른 누진세도 없었다. 이자는 제로 이자율도 없지는 않았다. 기독교에서나 이슬람에서 이자놀이는 언제나 죄악이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것이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이교도 즉, 유대인을 중간에 끼워 넣었다. 샤일록이 안토니오에게 빌려준 3000두가트는 이자가 제로였다. 샤일록은 유대인이었지만 친구인 안토니오에게만큼은 이자를 받지 않았다. 아마도 살 한 덩어리를 더욱 극적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한 복선이었을 것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 1파운드의 살덩어리를 떼어내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서야 사건은 종료됐다.

이자는 우리나라에서도 언제나 가혹했다. 중세 조선의 이자와 지대는 가히 착취적이었다. 원금의 3분의 2에 육박했던 시기도 있었다. 100%를 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그 이상도 많았다. 농촌 이자율의 장기변동이라는 주제로 조선 후기의 이자율 변동을 추적한 논문(김재호 박기주: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 이영훈 편저)에 따르면 민간 부조조직인 계(契)조차 50%에 수렴하는 이자를 받았다. 보통은 월 5%의 이자였다. 법정 한도는 연 20%였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조선 후기 개항장에서 일본인에 의한 대출은 월 10%를 넘어서기도 했다(서길수 1987. 위 논문에서 재인용).

전(前) 산업사회에서 대부 이자는 너무도 높아서 금융업이라기보다는 신분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중세 경제에서 고리대라는 것은 분명 샤일록의 파운드 살점보다 무거웠다. 채무자는 거의 필연적으로 인신의 구속, 즉 노예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역을 도모하거나 고리대를 쓰는 것은 노예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이었을 것이다. 지금 바로 그 이자가 역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있다. 너무 높은 이자는 필시 착취적이었을 테지만 너무 낮은 이자, 혹은 마이너스 이자는 어떻게 해석돼야 하나.

저축을 몰아 투기의 먹잇감으로 내준다는 면에서 그것은 부도덕하다. 절약과 절제 즉, 지금의 소비를 미래의 소비로 연기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도덕의 원천이다. 마이너스 금리는 인간 덕성의 원천을 파괴한다는 면에서 죄악이다. 국가가 덕성을 파괴하는 일이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는 부동산 투기 붐을 만들어냈던 덴마크와는 분명 다른 반응을 불러내고 있다. 일본 국회의 히스테리컬한 비판도 일리가 있다. 더구나 노령화 사회다. 인구의 3분의 1이 연금소득자다. 마이너스 금리는 연금소득을 여지없이 파괴하면서 미래 희망의 싹을 잘라버린다. ‘10만엔을 예금하면 이자가 10엔짜리 동전 한 닢’이라면 앞날은 없다. 마이너스 이자는 고리대금보다 더 엄청난 파괴 즉, 시간 가치의 파괴와 덕성의 파괴를 불러올 것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