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나를 넘다
나는 서울대 농구부 주전 센터였다. 당시 팀에서 키(180cm)가 제일 컸기 때문이다. 체육교육과 친구들에게 따로 농구 기술을 배울 만큼 열정이 넘쳤던 그 때, 내 희망은 장충체육관 코트를 누비는 것이었다.

꿈의 무대를 그리며 치른 예선 1차전에서 ‘농구 최강’ 고려대와 붙은 건 불행이었다. 키가 2m 가까운 상대 센터는 ‘농구계의 전설’ 박한이었다. 얼추 80 대 30으로 처절하게 깨졌다.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선전에 관중석의 박수는 뜨거웠다.

미국 유학 시절엔 달리기를 시작했다. 1980년대 동아마라톤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42.195km를 4시간12분 만에 골인했지만, 30km 이후부터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겨우 결승선을 밟았다. 아무리 달려도 갓 출발한 것처럼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막막함은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른다. 나로선 마라톤 인생 첫 완주이자 기적이었다.

대신증권에 근무할 땐 암벽 타기에 푹 빠졌다. 북미 최고봉 맥킨리를 등반한 부하 직원의 영향이 컸다. 전문 산악인이었던 그를 따라 북한산 인수봉 암벽을 처음 탔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던 경사도 노련한 베테랑이 앞에서 잘 이끌면 안전하게 오를 수 있었다. 암벽 등반을 하다 보면 위험하다 싶은 곳에선 사고가 거의 안 난다. 대부분 조심조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습게 보이는 데서 방심한 나머지 걸음이 꼬이고 발을 헛디딘다. 나도 30대 후반에 인수봉 암벽에서 10m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느리게 지나갔다. 사람이 별안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신기하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아내는 “나라를 구하는 일도 아닌데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며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나는 한술 더 떠 단짝 직원과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리라는 계획을 짰다. 실제 우리는 한겨울 설악산을 자주 들락거렸다. 깊은 눈을 헤쳐 나가며 길을 뚫는 이른바 ‘러셀(russel) 훈련’을 하기 위해서였다. 영화 ‘히말라야’에서처럼 눈 속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고, 산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에베레스트 등반은 불발됐고, 예순을 넘긴 지금 마라톤과 암벽 등반도 접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등산을 즐기고, 집에선 ‘마운틴 채널’을 주로 본다. 틈이 나면 10km 조깅도 즐긴다.

농구와 마라톤, 암벽 등반은 저마다 운동 방식도, 장·단점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결국 오롯이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하면 할수록 내가 가진 한계와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애초 절대적인 한계란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오를 의지가 없을 때, 그 지점이 내 최종 한계로 기억될 뿐이다.

김한 < JB금융그룹 회장 chairman@jbf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