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공학은 나의 힘
나는 공대 출신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재미 없다"는 기계공학과를 나왔다.

“문과는 늦은 나이에 시작해도 배울 수 있지만, 이과는 학교에서 일찍부터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따라잡기 힘들다”는 아버지 조언을 따랐다. 고등학교 때 이과를 싫어하면서도, 수학과 물리를 잘한 점도 반영됐다.

기 계공학과에선 기계를 만드는 원리와 기술을 배웠다. 당연히 기계 설계도를 그리는 게 기본이었다. 새내기 첫 수업부터 1년 내내 넓디넓은 제도지에 가느다란 실선과 사선을 미치도록 그렸다. 지금이야 모든 작업을 컴퓨터로 하기 때문에 클릭 몇 번만으로 도면을 쉽게 수정할 수 있지만, 1970년대만 해도 일일이 연필로 그리던 시절이었다. 실수로 선 하나를 잘못 그어도 며칠 밤을 꼬박 새워 완성한 설계도 전체가 휴짓조각이 되기도 했다. 매일매일 자잘한 미시적 일상이 이어지다 보니, 전공에 대한 흥미도 잃어 갔다. ‘이왕 들어온 대학이니, 졸업은 하자’며 4년을 겨우 버텼다.

2학년 중간고사 때는 내가 제일 존경하던 고(故) 이태식 교수가 굴욕을 안겼다. 문제를 맞히면 가산점을 주고, 틀리면 점수를 깎는 채점 방식이었는데, 난 100점 만점에 마이너스 10점을 받았다. 야학을 하면서부터는 전공과 먼 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 쪽이 발달한 독일 유학을 꿈꿨지만, “사회학을 전공해서는 네 가족을 먹여 살리기 힘들다”는 아버지 말씀에 이마저 접었다. 한창 야학을 함께하던 연세대 학생과 열애 중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문제적 공학도'는 독일 대신 미국행을 택했고, 예일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원 장학금을 줬던 제너럴모터스(GM)를 미국에서 다녔다. 하지만 워낙 조직이 크고, 기계가 자동화한 탓에 전공은 별로 쓸모없었다.

외려 공학 지식이 가장 도움이 된 분야는 금융업이었다. 금융은 모든 게 숫자다. 숫자를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회사를 인수하거나 투자할 때는 기술력이 있느냐가 핵심 기준이다. 경영학을 전공한 경영인 대다수가 숫자만 보고 기업 가치를 판단할 때 공학도인 나는 회사 대표를 만나 엔지니어링과 프로세싱에 관해 얘기했다. 기술 결함은 없는지, 불량률이 어떤지 꼼꼼히 따졌다. 이런 깐깐한 자세는 협상 상대를 긴장시키고, 기업 인수·합병에서 성공 확률을 높였다.

기술을 어떻게 금융과 연결할지는 예나 지금이나 나의 최대 관심사다. 내가 우리나라에선 낯선 분야인 금융공학(Financial Engineering)에 일찍이 관심을 갖고, 국내 은행권 최초로 핀테크(FinTech, 금융+기술) 경진 대회를 연 배경이다.

바야흐로 모바일과 SNS, 빅데이터 등을 활용한 핀테크가 대세다. 과거 기계공학도를 괴롭혔던 숱한 선과 숫자 더미가 오늘날 산업 가운데 제일 혁신적이고 경쟁이 치열한 금융업계에서 살아남게 한 자산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풋내기 공학도가 금융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사랑한 연대생, 아내 김영란 덕분이라는 사실이다.

김한 < JB금융그룹 회장 chairman@jbf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