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공부] 러시아 몰아내기 위한 일본의 '황후 시해' 을미사변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고종이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임오군란 때문에 청나라의 입김이 강해졌고 그에 대한 반발로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청나라가 톈진조약을 맺었고 그 조약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 때문에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이긴 일본은 엄청난 전리품을 챙기려 했습니다. 이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삼국이 간섭을 하여 일본의 팽창을 막았고 이후 조선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경복궁 건청궁 안에 있는 옥호루. 이곳까지 일본의 폭도들이 침입해 명성황후를 무자비하게 시해했다.
경복궁 건청궁 안에 있는 옥호루. 이곳까지 일본의 폭도들이 침입해 명성황후를 무자비하게 시해했다.
작전명이 ‘여우 사냥’이라니

삼국간섭의 결과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은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일이 되고 그 공을 러시아가 대신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파 대신인 이범진과 이완용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나랏일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또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를 초대해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달라고 간절히 청하기도 했습니다. 베베르 공사는 큰 나라인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큰소리쳤지요. 그러나 그때 러시아는 일본에게서 한반도를 나누어 갖자는 제의를 받고 어떻게 할 것인가 궁리하던 참이었습니다.

일본은 친러 내각의 중심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성황후만 처치하면 고종을 자신들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1895년 을미년 8월 20일 일본은 ‘여우 사냥’이라는 작전을 결행했습니다. 제목이 무엇이든 결과가 참혹하긴 마찬가지입니다만, ‘여우 사냥’이라는 작전명은 특히 기분이 나쁩니다. 남의 나라 왕비를 마구잡이로 제거할 대상으로 여겼다는 얘기니까요.

또 그들은 명성황후 시해의 책임을 흥선대원군에게 덮어씌우려 했습니다. 경복궁을 습격하러 오기 전 그들은 운현궁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가마에 태워 경복궁으로 데리고 왔지요. 조선의 왕실에서 시아버지가 왕비인 며느리를 끝내 죽였다고, 천륜을 거역한 사건으로 꾸미려 한 것입니다.

일본의 폭도들은 정말 잔인하고 무도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했습니다. 새벽에 임금과 그 가족이 자고 있는 궁궐에 쳐들어와 왕비를 내놓으라며 이 방 저 방을 마구 뒤지고 다녔답니다. 그 와중에 세자는 상투를 잡히고 폭도들의 칼등에 맞아 실신하기도 했지요. 고종은 미처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서 왕비가 살해되는 것을 봐야만 했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 청량리에 있던 릉을 고종 서거 후 경기도 남양주로 옮겼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 청량리에 있던 릉을 고종 서거 후 경기도 남양주로 옮겼다.
황후 시신까지 훼손한 일본

폭도들은 명성황후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비가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옥호루 안 병풍 뒤에 숨었지만 폭도들은 거침없이 그녀를 찾아냈습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왕비를 보호하기 위해 그 앞에 양팔로 막고 섰지요. 폭도들은 이경직의 양팔을 칼로 내리쳤습니다. 그리곤 건천궁 장안당 뒤뜰로 왕비를 끌어내어 가슴을 짓밟고 칼로 마구 찔러댔답니다. 이후 홑이불로 시신을 싸서 옥호루 옆 녹산으로 가서 석유를 붓고 불태웠습니다. 화장이 아니라 시신의 훼손이었지요. 타다 남은 시신은 그대로 버려두고 돌아간 것입니다.

8월 22일 일본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다시 친일 내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를 폐서인으로 한다는 발표를 하게 하였습니다. 왕비를 내쫓는 이유는 당파를 만들어 왕의 총명을 막고 인민을 착취하며 관직을 사고 팔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일본은 “왕비와 적대 관계에 있던 대원군이 일본 공사에게 요청하여 일으킨 사건이며 시해는 조선군 훈련대가 자행한 것”이라고 거짓 보도까지 하여 대원군에게 왕비 시해의 누명을 씌웠습니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육신뿐만 아니라 명예까지, 두 번 세 번 난도질하려 했습니다.

목격자 덕분에 밝혀진 을미사변

그런데 을미사변의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 경복궁에 머물고 있던 미국인 다이와 러시아 인 사바틴이 그 참담한 광경을 다 본 것입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미국 공사 앨런을 비롯한 여러 나라 외교관들이 일본의 만행을 비난했습니다. 일본은 그제야 슬그머니 관련자 40여 명을 구속하여 재판도 하고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해 여론이 잠잠해지자 그들은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이후에도 일본 내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을미사변을 일으킨 주요 인물은 시바 시로, 스키나리 하카루, 구니모토 시게아키, 야마다 레세이 등입니다. 일본은 을미사변이 깡패들이 일으킨 난동에 불과할 뿐 일본 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깡패가 아니었습니다. 하버드 대학 졸업생에 한성신보 주필, 일본 신문 특파원 등 지식인들이었지요. 또 일본 정부의 지원과 사주를 받은 것이 여러 자료를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장례는 을미사변으로부터 2년 후인 1897년에야 제대로 치를 수 있었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에 떨던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기 때문입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