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독종 감독 박만복과 인간 '맘보 박'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현지에서 들으니 또다른 감동을 준다. 남미 대륙 서쪽의 태평양과 안데스산맥을 품고 있는 나라 페루에서 국민 영웅으로 떠받드는 박만복씨 이야기다. ‘페루의 히딩크’로 불리는 그는 아이돌을 넘어서는 인기의 대상이다. 페루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맘보(만복) 박’하면 촌부도 알 정도다.

1974년 페루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스카우트된 그가 ‘88서울올림픽’에서 페루 최초 올림픽 은메달의 감동을 선사한 지 2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맘보 박’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현지 한국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한국인들의 열렬한 응원에 힘입어 페루팀이 중국, 일본 등 강호들을 물리치고 소련과 만난 결승전에서의 일이다. 페루는 15-10, 15-12, 그리고 3세트 중반까지 12-6,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 세트 스코어 3-0의 완벽 승리로 금메달을 눈앞에 뒀었다. 그때 이해하기 어려운 2명의 선수교체가 있었고 이후 역전당한 판세를 되돌릴 수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내게 이야기를 해준 현지 한국인이 당시 선수교체를 한 이유를 물었는데 박 감독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문득 벤치를 보니 그 고된 훈련을 함께하면서 한 번도 코트에 서지 못한 선수 둘이 눈에 밟혔단다. 다 이긴 게임이라고 확신하고 그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는 ‘감독 박만복’이 아니라 ‘인간 박만복’이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세계대회에서 승리를 따내 페루에서는 체육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훈장을 받고 국민적 영웅이 됐다.

하지만 필자는 따뜻한 인간과 명감독 사이에서 흔들렸던 그 순간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다가왔다. 최근 한국 경제가 바로 그런 순간을 오락가락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올해 한국 경제를 둘러싼 환경 변화의 파도는 거칠다. 오죽하면 둘 이상의 태풍이 충돌해 그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커지는 자연현상을 말하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새해 한국 경제가 직면한 현실을 묘사하는 용어가 됐을까. 저성장, 저물가의 경제 현실 탓에 몇몇 대기업을 제외한 기업들의 매출과 수익성이 곤두박질치고 있고 경착륙이 우려되는 중국 경제로 인해 예상되는 타격은 어림잡기도 힘들 정도다. 또 본격화하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에 대응해야 하는 산업현장은 아직도 갈 길을 모르는 듯하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파장,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중국 금융시장, 저유가로 인한 신흥국 경제 불안, 엇갈리는 주요국의 통화정책 등 동시다발적 충격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기본적인 경제 법안조차 통과시키지 않은 채 정쟁만 일삼고 있다. 국가 경쟁력을 높일 발판이 될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 청년 일자리에 희망이 될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이 국회선진화법이란 벽에 가로막혀 있다. 노동개혁의 핵심을 이루는 법안 개정에서도 후퇴해 하나마나한 개혁이 돼가는 모양새다. 이대로라면 한국 경제는 위기 탈출이 불가능하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파도타기의 명수가 돼야 하고, 그런 면에서 늘 위기설에 시달려온 것은 한국 경제의 숙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겹겹이 거친 파도 속에서도 한국 경제는 뚝심을 발휘해 왔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절치부심 연구개발(R&D)에 전력 투구, 제조업의 한계를 허물었다는 찬사를 들으면서 수출을 늘려 지난해 무역규모 세계 6위라는 성과를 일궈냈다.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와 외환보유액, 안정적인 단기외채 흐름 등을 감안할 때 외환위기 때와 같은 유동성 위기 가능성은 매우 작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경제의 기초체력이 아니라 유동성 부족의 문제였다면 올해 한국 경제 위기의 진앙은 부진한 실물경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경제가 ‘퍼펙트 스톰’에 말려들지 않도록 정말 독한 ‘감독 맘보 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인실 <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