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기술 진흥 50년]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 "과학기술 진흥 50년, 기업인 역할 컸다"
1966년 2월4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출범했다. 같은 해 9월24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창립됐다. 그래서 올해를 과학기술 진흥 50년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진흥 50년은 경제발전사와 맥을 같이한다. 과학자들이 척박한 환경에서 기술 토양을 제공했다면 산업역군들은 피땀을 쏟아 오늘날의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이 과정에서 미래를 꿰뚫어보는 기업인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1990년대 초 과학로켓(KSR)과는 별도로 정몽구 현대정공 회장(현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우주 발사체용 액체로켓 기술 개발을 시도한 일이 있다. 정 회장의 지원으로 우주강국인 러시아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현대정공이 공동으로 액체로켓 기술 개발을 시도했다. 비록 중간에 좌초했지만 훗날 나로호 개발과 한국형 발사체(KSLV-2) 개발의 초석이 됐다.

1990년대 초는 선진국 기술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주, 원자력, 해양 등 규모가 큰 연구에 대한 과학계의 열망이 커지던 때였다. 지난해 수출에 성공한 중소형 원자로와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도 이때 씨앗을 뿌렸다.

2003년 완공돼 (해양)관할권 선점 효과를 가져온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를 짓겠다고 선뜻 나선 이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었다.

최근 벌어진 중국과의 서해 배타적경제수역(EEZ) 관할권 논란 중심에는 이어도가 있다.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서 남서쪽으로 149㎞ 떨어진 수중 암초는 2003년 해양과학기지가 들어서면서 한국이 실질적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다. 주변 해역에는 막대한 자원이 매장돼 있고 중요한 해상 교통로여서 전략적 가치가 크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도 전설로만 전해온 신비의 섬이던 이 수중 암초의 관할권을 확보한 데는 이동영·심재설 한국해양연구소(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의 공이 컸다.

[한국 과학기술 진흥 50년]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 "과학기술 진흥 50년, 기업인 역할 컸다"
1993년 4월 장관에 임명된 뒤 해양연구소를 찾은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이어도란 암초에 작은 무인 관측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한반도 해류와 날씨 연구를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과학 연구뿐 아니라 관광산업과의 연계 효과도 커 보였다. 장관 취임 전 학교에서 체육위원장을 하면서 미국 괌에 전지훈련을 간 일을 떠올렸다. 당시 학생들을 데리고 해양 관광명소를 들렀는데 거기서 민간 잠수함이 관광객을 가득 태우고 바닷속 생물을 관람하는 모습을 봤다. 이어도도 가능할 것 같았다. 우선 중국·일본과의 외교 문제를 챙겨야 했다. 미국에서 저명한 해양법 전문가를 불러 국제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문제는 암초에 과학기지를 세우는 일을 맡을 회사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헬리콥터 관광사업을 하고 있던 한진관광은 사업 제안을 받자마자 자신이 없다며 포기했다. 삼성그룹 계열사이던 삼성관광에 제안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화답을 해온 이가 지금 안타깝게도 병상에 있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이 회장은 독일 출장을 다녀온 뒤 소식을 듣고 “당연히 국가사업인데 협조해야지”라며 “삼성관광 말고 삼성중공업이 맡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사업은 김영삼 정부와 삼성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아쉽게 물거품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2003년에 가서야 현대중공업이 사업을 마무리했다. 당시 인천에서 열린 준공식에 초청받아 가동 버튼을 누르며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뭉클했다.

필자가 장관으로 있던 1993년 무렵은 이처럼 과학기술계에 선제 투자와 역동성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1960년대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민간 과학단체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이 설립되면서 과학기술의 기반을 닦은 시기였다면 1970년대는 선진국 연구를 모방하고 산업화하는 시기였다. 전두환·노태우 정부도 경제 성장에 초점을 두다 보니 과학계에 이렇다 할 큰 변화가 없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과학기술계는 활력을 찾았다. 1980년대 한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면서 과학기술 분야에 선제적이고 장기적인 투자가 가능해진 덕분이다. 1993년 2월18일 취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김 당선인은 “과학기술계에는 왜 그리 말이 많으냐”며 “과학기술처를 맡아 신한국 창조를 위해 일하자”고 했다. 과학로켓과 나로호, 한국형 발사체로 이어지는 우주 개발의 첫발을 내디딘 시기도 바로 이때다.

1980년대 한국에선 로켓 개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미사일로 전용될 수 있는 장거리 로켓 개발을 포기하겠다는 미국과의 약속 탓에 로켓이란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1992년 발사한 한국의 첫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를 개발한 것도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회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우주발사체에 사용될 액체로켓 개발도 조심스럽게 시동을 걸었다. 1993년 4월 충남 안흥 발사장에서 우리 기술로 개발한 과학로켓 2호 발사 행사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모두 발사에 성공했다고 들떠 흥분했지만 필자는 오히려 실망감이 컸다. 고작 150㎞ 날아가는 로켓으론 만족하기 일렀다. 채연석·유장수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책임연구원 등 5명의 과학자를 불러 더 멀리 쏘아 올릴 액체로켓 기술을 개발하도록 주문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우주사업에 관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에 협조를 요청했다. 러시아 로켓 기술자들도 불러왔고, 기술을 공부할 발사대도 옮겨왔다. 마북리 연구소에서 항우연 과학자 20명에게 현대정공이 초청한 3명의 러시아 기술자들로부터 액체 발사체 기술을 전수받게 했다. 모든 일은 조심스럽게 진행됐고, 이 과학자들이 훗날 나로호 개발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1995년 김영삼 정부와 현대가 갈등을 빚으며 현대의 우주 개발 노력은 중단됐다. 그동안 투자한 비용을 떠나 성공했더라면 한국 액체로켓 연구는 지금보다 10년 정도 앞섰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당시 참여한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통신·기상·관측용 인공위성을 우리 손으로 만들고, 달 탐사 계획을 추진하게 된 것은 우리 과학기술계의 쾌거임에 틀림없다.

이런 저력은 50년 전 한국 과학 태동기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필자가 장세헌 서울대 교수의 권유로 고려대 조교 생활을 시작한 1955년 무렵 이공계의 사정은 참담했다. 새로 개설한 화학과는 40평 정도의 연구실을 화학 물리 생물 실험실로 나눠 써야 했을 정도였다. 수도와 전기는 물론이고 변변한 실험기구도 없었다. 시약은 청주 병에 넣어둬야 했다.

1953년부터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이공계 실험용 기자재가 들어오고 서울대 의대·농대·공대 교수들을 유학 보내기 시작하면서 과학기술의 태동기가 열렸다.
[한국 과학기술 진흥 50년]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 "과학기술 진흥 50년, 기업인 역할 컸다"
1956년 미국과 맺은 ‘한미원자력협정’도 우리 과학기술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문교부에 원자력과가 설치되고, 이학·공학·농학 등 과학기술계 인사 237명을 국비 유학생으로 해외에 파견했다. 1963년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됐다. ‘잘 살아보자’는 구호를 내건 ‘새마을 운동’과 함께 경제 재건과 조국 근대화를 목표로 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가 됐고, ‘과학기술입국’이 국정의 최고 목표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미국 방문에 나섰다가 만난 김기형 뉴욕에야리덕션 전자요업연구소 박사를 한국에 초청해 지프 한 대를 주고 한 달 동안 전국을 돌아보게 했다. 김 박사는 ‘농가의 농지가 평균 0.8(1는 1만㎡)밖에 되지 않아 경제성이 없으니 시급하게 탈(脫)농업·공업화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를 받은 당일 박 대통령은 김 박사를 경제과학심의위원회의 장관급 상임위원으로 위촉하고 과학기술처를 신설해 초대 장관을 맡겼다. 사카린 밀수와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어수선했던 당시 과기처 설립은 박 대통령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

김 장관은 미국의 경제고문에게서 “미국에서도 반대가 심해서 세우지 못한 과학기술처를 한국에서 먼저 세우다니 부럽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1966년 서울 홍릉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들어섰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하는 30여개 정부출연연구원 대부분이 KIST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박 대통령은 “우리에겐 식량이나 생필품보다 과학기술연구소가 필요하다”며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연구원들에게 최고 수준의 보수와 최대한의 자율권을 보장했다.

박 대통령의 KIST 사랑은 남달랐다. KIST를 찾아 최형섭 소장을 비롯한 연구원들과 격의 없이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눴다. 포항제철 건설 기획을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를 찾은 KIST 연구원들에게 육영수 여사는 따뜻한 곰탕을 점심으로 대접했다. 1966년 5월19일 ‘발명의 날’에 개최된 전국과학기술자대회에서 순수 민간단체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의 창립을 결의했다.

200여명의 과학기술인이 모여 김윤기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권영대·김해림·김호식·명주완·김동일을 부회장으로 뽑았다. 과총 회장단은 12월 박 대통령을 만나 과학기술 행정 전담부서 설치와 과학기술센터 건립비 3000만원 지원을 약속받았다.

50년 과기 정책에도 굴곡이 많았다. 노무현 정부 때 도입한 과학기술부총리 제도에 대해 이명박 정부 들어 무용론이 고개를 들었다. 행정부의 모든 부처가 연구개발 사업을 하는 마당에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부총리급의 과학기술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과학기술계가 들고 일어나 과기부·정보통신부·해양수산부의 해체를 반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래창조과학부가 생겼지만, 선진국에서도 부러워했던 과학기술전담 행정부서의 부활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 2013년 3월 박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각계 원로 10명과의 간담회가 열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본받아 줄 것과 한미원자력협정의 합리적 개정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한강의 기적’은 온 국민이 함께 힘을 합쳐 노력한 결과였다. 특히 확고한 개척 정신과 장기적인 안목으로 과학기술 발전에 힘써 온 과학기술계의 공이 컸다고 자부한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 육성을 위한 정책적 뒷받침과 꿈꾸는 과학자가 없으면 한국의 장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 김시중 전 장관은 누구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1993년 2월 취임한 뒤 1년10개월간 김영삼 정부 초창기 굵직한 과학기술 정책을 이끌었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건설과 과학로켓 발사, 무인탐사정·중소형 원자로 개발 등이 이때부터 추진됐다. 생명공학육성기본계획과 소프트웨어기술 중장기 계획도 수립됐다.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 과학기술포럼 이사장, 국민원로회의 위원을 맡아 과학계 원로로서 정부에 장기적 안목으로 일관된 과학 정책을 펼쳐달라는 쓴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김 전 장관은 평소 과학자가 제대로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 약력

△1932년 충남 논산 출생 △서울대 화학과 및 대학원 졸업 △고려대 박사 △고려대 교수·이과대학장·체육위원장·부총장 △한국과학교육단체총연합회 초대 회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대행 △제14대 과학기술처 장관 △대한화학회 제28대 회장 △사단법인 과학기술포럼 이사장 △광주과학기술원 이사장 △제14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명예회장 △국민원로회의 위원

정리=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